예술과 패션의 나라, 프랑스 일주여행 105

54.1923년 벨라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 마르크 샤갈

그가 종종 러시아 장면을 그리는데 사용한 구와슈 기법을 배운 곳도 파리였다. 그는 또한 몽마르트와 카르티에 라탱(Latin Quarter)을 종종 방문을 했고, 파리지엥으로 숨 쉬는 것을 행복해 했다. 그는 비테브스크에 남아 있는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녀를 항상 생각하고 그녀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내 약혼녀에게』,『골고다』,『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스 발덴 스트름 갤러리(Herwarth Walden's Sturm gallery)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의 성공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와서 화가..

53.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 샤갈

시골의 미술학교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자신만의 예술적 스타일을 발전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생풀드방스의 대성당- 예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제임스 스위니는 샤갈이 처음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 입체파(Cubism)가 지배적인 예술 형태였으며, 프랑스의 예술은 여전히 19세기의 물질주의적 외관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에서 잘 익은 색채 재능과 신선하고, 감성에 대담한 반응과 단순한 시에 대한 느낌과 유머를 갖춘 채 파리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파리에는 낯선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처음의 인식은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볼레즈..

52.마르크 샤갈(Marc Chagall)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년 7월 7일~1985년 3월 28일)은 현재는 벨라루스 땅으로 당시 러시아제국 리오즈나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린다. 1887년 7월 7일 그는 러시아제국 리오즈나에서 유대인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 비테브스크의 인구는 약 66,000명 정도였고, 그 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그림 같은 교회당과 유대교회가 있었고, 옛 스페인제국의 문화의 중심지로 이곳은「러시아의 톨레도」라고 불렸다. 대부분의 건물이 목조건물이었으므로, 그것들 중 어떤 건물도 3년 후 나치의 침공 때 보존되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 샤갈은 9형제 중 맏아들이었으며, 그의 성 샤갈은 보통 유대가정에서..

51.샤갈의 자취를 남긴 생폴드방스

새로운 태양이 빛을 발하며 떠오르는 2016년 7월 19일의 아침은 6시경에 침대에서 내려와 오늘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날 아침은 7시 50분쯤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호텔직원이 정해주는 좌석에 앉아 식사를 마친 9시경,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했다던 생폴드방스를 향하여 전용버스를 타고 니스를 떠나온다. -수많은 인파들이 7월 14일, 트럭테러를 당했던 이곳저곳에 모여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30분 쯤 달려서 도착한 생폴드방스는 아를에 비하면 소담스럽고 앙증맞은 마을이랄 수 있다. 고급스러운 숍들과 늘씬한 해변에 지친 여행자들에게는 안식이 되는 예술가의 고장이다. 샤갈, 르느와르, 마네,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은1900년대 초반 이 마을을 찾아 몸을 기댔던 예술가들의 면면들이다. 어느 ..

50.카지노「몬테카를로」의 모습

모나코 북부, 남쪽에 있는 모나코시(市)와는 항구를 중간에 두고 반대쪽 인구 약 1만 5천(1990)명과 남쪽에 있는 모나코시(市)와는 항구를 중간에 두고 반대쪽에 위치한다. 1856년 샤를3세가 공국의 재원확보를 위하여 카지노개설을 허가하였으며, 1861년 개설된 이래 칸·니스와 함께 지중해의 관광·휴양도시 및 해수욕장으로 발전하였다. 국영도박장의 제일 오래된 부분은 파리오페라극장을 설계·건축한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하였으며, 1879년 개설되었다. 도박장 안에는 극장·홀·룰렛용 방이 있고, 앞뜰은 계단식화단으로 되어 있다. 도박용 테이블은 관광객에게만 개방되며 도박장 외에 고층호텔과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매혹적인 카지노인 몬테카를로의 그랑 카지노는 1878년 모나코 공, 샤를..

49.모나코 왕가의 문양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보았는가? 핀란드로 향하는 바이킹라인에서 바라보았던 북대서양의 푸른 바다도, 포르투갈의 로까곶에서 내려다본 대서양의 넘실대던 파도의 하얀 거품도, 그리스 에게해의 짙은 바다도 이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타오르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려는 듯 끝없이 펼쳐진 모나코 앞 지중해의 푸른 물결은 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이렇게 바다는 그저 고요히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모나코왕국 요새의 전망대 아래로는 조용한 계단이 이어져있고 온갖 종류의 선인장과 나무로 둘러싸인 계단 한편의 작은 공간엔 다정한 연인들이 하나뿐인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울창한 나무가 제공해주는 그늘을 벗 삼아 눈앞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모나코 왕가..

48.그레이스켈리와 레니에3세의 결혼식

1956년 어느 유명한 여배우가 백마를 탄 왕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다이알 M을 돌려라(Daial M for Murder)」,「갈채(Country Girl)」 등으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여배우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할리우드 스타「그레이스켈리」와 모나코 왕자「레니에3세」가 바로 그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는 꿈속에 그리던 백마를 탄 왕자를 얻었고, 부족할 것 없는 신출내기 왕자도 만인의 연인이자 금발의 미녀였던 은막의 스타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부족할 것 없는 둘의 결혼은 전 세계인의 축복을 받았고 세기의 결혼이라는 명예도 얻게 되었다. -모나코 지중해 북쪽 호화 요트가 정박해있는 항구- 하지만 수많은 남성 팬들은 더 이상 스크린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47.지중해와 F-1, 요트로 치장된 도시

모나코는 세금도, 군대도 없다. 물, 가스 등 생활필수품과 국정에 대한 일부도 프랑스에 의존하는 어찌 보면 태평천국이다. 그런 모나코의 주 수입원 역할을 하는 게 F-1 자동차 경주와 카지노다. 매년 5월에 열리는 F-1 경기를 위해 항구 일대는 봄부터 단장에 분주하다. 이곳 포뮬러-1 경주는 전용 트랙에서 열리는 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 펼쳐지는 게 특이하다. 바로 코앞이 항구요 지중해다. 별도의 관중석이 마련돼 있긴 하지만, 빌라 옥상에서 맥주 한잔 즐기며 수려한 경관 속에서 폭음의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며 대축제를 만들어내는 경주를 관람할 수 있다. -지중해 북쪽의 모나코는 겨울에도 봄날같이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호화 요트가 정박해있는 항구와 절벽위의 환상적인 그랑카지노 등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

46.그레이스 켈리의 추억이 서린 왕궁

-모나코 사진, 우표 등 모나코 곳곳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모나코(Monaco)는 앙증맞다. 바티칸시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로 프랑스에서 전용버스로 스쳐 지나온 남부 코트다쥐르의 도시보다도 더 아담하다. 작은 모나코이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늘 신비롭고 호사스럽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역에 내리면 한 여인의 흔적을 쫓게 된다. 마릴린 먼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가 그 주인공이다. 모나코 전 국왕인 레니에3세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던 그녀의 일화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잔영처럼 남아 있다. “내 궁전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어요.” 당시 모나코 왕자였던 레니에3세는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그레이스 켈리에게 이렇게 청혼했다. -모나..

45.모나코의 역사

모나코는 그리말디가가 13세기부터 통치하였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모나코시(市)의 곶 안쪽의 항만은 헤라클레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BC 10세기경 페니키아인이 최초로 이 항만에 들어온 뒤, 그리스인·카르타고인·로마인 등에 의해 안전한 항구로서 이용되었다. -모나코 왕궁 요새에서 바라본 모나코- -모나코 왕궁 요새에서 바라본 모나코- 로마시대에는 무역항으로 번영하였으나, 민족대이동의 혼란기에 항구와 도시가 함께 파괴되었다. 7세기 이래 모나코는 롬바르디아 왕국·아를 왕국 등의 영토였다가 약 200년에 걸쳐 사라센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0세기에 들어와서 제노바의 명문 그리말디가(家)가 프랑스의 원조를 받으면서 진출하여, 1297년부터 그리말디가의 영지가 되었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의 보호국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