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패션의 나라, 프랑스 일주여행 105

75.영국의 왕으로 즉위한 헨리2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2세

카롤링거 왕조가 이후에 두 가문 사이에서 때때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곤 했던 권력 투쟁을 거쳐,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재위 987~996)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공작이며 파리의 백작이었고,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의 분파까지 포함하는 카페왕조를 창설하였다. 카페왕조는 800년이 넘는 세월동안 1792년 루이16세의 처형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911)에 의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이킹족의 두목 롤로에게 하사된 공작령인 센 강 하류의 노르망디 공국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오르세 미술관 소장- 1066년에 롤로의 후손 노르망디공작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재위 1066~87)프랑스왕실에게는 다루기 곤란한 지역이 되었다. 비록 프랑..

74.프랑크왕국의 전성시대를 연 카롤루스 대제

-17~18세기의 몽생미셸- 훈족의 쇠퇴 이후, 프랑크족은 클로비스1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하면서 481년에 왕국을 수립하게 된다.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인 클로비스1세는 기독교의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한 뒤 다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갈리아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왕국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권한은 6세기 후반부터 약화되기 시작하여 실권은 왕실을 관리하던 궁재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8세기에 궁재였던 카를루스 마르텔은 프랑스의 투르지역에서 이베리아반도를 통해 북쪽으로 진군하던 이슬람 군을 대파함으로써 프랑스왕국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은 국내의 반발세력들을 진압하고, 약화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린 후에 카롤링거 왕조를..

73.프랑스 역사가 시작된 갈리아지방

-10세기경의 몽생미셸- 여기에서 프랑스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프랑스역사의 시작은 대체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1세(Clovis Ier)가 갈리아지방의 가장 큰 부분을 정복했던 486년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크정부 후의 프랑스정부는 이 시기부터 중단 없이 존재해온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이다. 만약 프랑스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대략 1190년이 돼서야 사용되었다면 필립2세의 상서국이 왕을 가리키기 위하여 프랑크족의 왕이란 단어 자리에 프랑스의 왕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라는 단어는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현대 프랑스지역에는 고대에 갈리아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 이들은 로마를 침공하여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로마가 강해져 알프스산맥 지..

72.예술가로서 실패만 거듭한 삶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인상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고갱은“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고갱은 1888년에“종합주의(synthétisme)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만난 모네의 뮤즈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에 12년을 살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아르장퇴유 초기에 집 정원을 그..

71.거대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

1897년 고갱은「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다.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었다. 당시 그는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폴 고갱의 작품「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70.고흐의「해바라기」는 고갱의 심장을 멎게 했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일화 가운데 고흐와 고갱에 관한 이야기만큼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거대한 산을 이룬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인「해바라기」는 고갱의 심장을 멎게 했단다 아를에서 고갱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고흐는 어느 날 재미있는 제안을 한다. 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것이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빛에 “이것 밖에 못 그리나?”라는 조소가 섞여 있다고 고갱은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고흐의 독촉이 거세지자 결국 고갱은 고흐에게 보내기 위한 자화상을 한 점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69.폴 고갱

폴 고갱의 작품으로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1889~1890, 38×46cm, 개인 소장 반 고흐가 이십 대를 훌쩍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의 절친한 친구 고갱은 한술 더 떠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에 증권브로커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상파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컬렉터가 되기도 했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실력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지망생치고는 수준급의 회화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증권브로커 직업을 그만두고 기성화가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더군다나 고갱은 이미 삼십대를 훌쩍 넘긴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폴 고갱 작「노란 색의 그..

68.프랑스의 기후

생트로페의 전경인 리비에라의 프랑스해안지역으로 1년을 통틀어 대부분 맑은 날씨를 보이고 있고, 기후변화가 그다지 심하지 않는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유럽의 기후는 보통 해양성·대륙성·지중해성으로 나누어지는데, 프랑스에는 이 세 가지 기후가 모두 나타나는 유럽기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샤모니 몽블랑의 DE Truc 산장과 몽블랑 산군의 많은 트레커들이 자유롭게 쉬고 있다- 이는 산지의 위치·높이와 더불어 기후에 지역차가 나타나는 요인이 된다. 겨울에는 쥐라·알프스·마시프상트랄 등의 산지가 고기압지역이 되는데, 때에 따라서는 아조르즈 고기압, 아시아 대륙 고기압과 연속하여 기압의 산맥을 형성한다. 이때 기압 산맥의 양쪽, 즉 영국·지중해는 저기압이 되고 사이클론선의 바람이 자주 불어온다. 비스..

67.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린 아를

남프랑스의 아를은 고흐가 사랑한 마을로서 그가 서성대던 카페, 병원, 골목길에도 고흐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적응을 잘못하고 떠난 비운의 화가를 부둥켜안은 쪽은 어쩌면 아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유작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이방인들은 고흐를 더듬기 위해 작은 도시를 찾고 있다.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목에 1년간 머물며 고흐는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이었고「해바라기」등 그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흐가 아를을 찾은 것은 1888년 2월, 겨울이었지만 파리의 우울한 생활을 벗어난 화가에게 도시에 대한 인상은 유독 따뜻했다. -아롤의 고흐의 그림이 소장된 아를「병원의 안뜰 1889속의 정원」- -아롤의 고흐의 그림이 소장된 아를「병원의 안뜰 18..

66.100만 배로 뛴 고흐의 그림 값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소장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흐는 평생 단 한 점밖에 작품을 팔지 못하고 생계는 전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의존하며 살았다. 그가 죽기 5개월 전「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약 10만 원)에 팔린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미술품 판매 일을 하던 동생 테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을 때 고흐가 자살했는데, 화가가 죽은 뒤에 그림 값이 치솟는다는 이야기를 평소에 여러 번 한 것으로 보아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과 그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자살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흐가 자살한지 7년이나 지나서「가셰 박사의 초상」이 고작 300프랑(약 7만 원)에 팔렸다. 60년 뒤인 1957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크리스 공장」이 86,600달러(약 9천만 원)에 팔렸고, 1987년 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