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인상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고갱은“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고갱은 1888년에“종합주의(synthétisme)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만난 모네의 뮤즈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에 12년을 살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아르장퇴유 초기에 집 정원을 그린 작품이다. '흐린 날씨의 라일락, 혹은 아르장퇴유의 모네 정원에 있는 라일락 아래 휴식'(1873년)이다. 활짝 핀 라일락 아래 한 여인과 두 남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1889년 인상파 화가전이 열리던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인상주의와 종합주의 화가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성 화단과 평론가 집단은 고갱의 예술적 재능에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컬렉터들도 고갱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갱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나이만 먹고 있을 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곳의 생활을 접고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가 아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작활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듯이 고갱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원시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렸다. 1893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새로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폴 고갱 작품「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94, 46×38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그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드가는 고갱의 그림들을 위해 전시를 주선해 주었고, 피사로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전시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즈음에 그린 또 한 점의 자화상은 당시 고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갱은 이 자화상 안에도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자화상 안에 전시된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던「죽음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고갱은 또 다시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냉소와 조롱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타히티였다. 1903년 심장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갱은 그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고갱이 자화상에 남긴 그림의 제목처럼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죽음」이라는 그의 작품뿐이었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전시 그림
'예술과 패션의 나라, 프랑스 일주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74.프랑크왕국의 전성시대를 연 카롤루스 대제 (0) | 2022.03.28 |
---|---|
73.프랑스 역사가 시작된 갈리아지방 (0) | 2022.03.25 |
71.거대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 (0) | 2022.03.19 |
70.고흐의「해바라기」는 고갱의 심장을 멎게 했다 (0) | 2022.03.16 |
69.폴 고갱 (0) | 2022.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