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종종 러시아 장면을 그리는데 사용한 구와슈 기법을 배운 곳도 파리였다. 그는 또한 몽마르트와 카르티에 라탱(Latin Quarter)을 종종 방문을 했고, 파리지엥으로 숨 쉬는 것을 행복해 했다. 그는 비테브스크에 남아 있는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녀를 항상 생각하고 그녀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내 약혼녀에게』,『골고다』,『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스 발덴 스트름 갤러리(Herwarth Walden's Sturm gallery)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의 성공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와서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 전시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독일평론가들은 그를 호평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러시아로 가서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테브스크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몇 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국경이 봉쇄되어 버린다. 1915년 벨라와 결혼을 하고, 그해 첫 딸 이다를 가졌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으로「생일(1915)」(샤갈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사랑 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 스민 감성 키워드 덕분이다. 따뜻한 색채로 사랑과 추억을 전하는 샤갈의 작품은 외로운 현대인들의 마음에도 따뜻한 빛 한 줄기를 선물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샤갈은 부유한 유대인 부르주아인 벨라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의 화가가 그들의 딸을 부양할 수 있을 지를 염려하였지만 결혼으로 인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정신은 대단히 고양되었다. 이 당시의 그림에는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샤갈에게 기회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위험한 시기였다. 당시 그는 가장 저명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고,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의 멤버 중 한사람이었다. 이것은 혁명의 미적 무장으로서의 위엄과 특권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후 러시아에 잠깐 살다가 1922년 고향을 포기하고 베를린을 통해 1923년 그녀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으로 산책(1917~1918) 국립 러시아 미술관(1915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하게 된 샤갈은 아내 벨라를 모델로 자주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산책은 사랑으로 가득한 충만한 행복감을 드러낸 작품이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나의 마을(1911」)뉴욕 현대 미술관소장-
마르크 샤갈의 작품으로 에펠탑의 신랑신부(1913)_조르주 퐁피두센터(샤갈은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샤갈이 남긴 글 가운데 ‘러시아 제국도 소련도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싸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라는 말은 그가 고국에 대해 지녔던 서글픈 감정을 대변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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