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그는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고 아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8년간 우울하게 보내다가, 1922년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온 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1968-76) 율법을 든 유대인」은 성경의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나 구약에 국한하지 않고 성경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그렸다-
1939년에 샤갈은 카네기상을 수상했는데, 그 후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국제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 되어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1944년 9월 2일 그의 아내 벨라가 갑작스런 감염으로 인해,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치료물품의 부족으로 죽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런 몇 달 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내를 회고하는 작품을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1947년 프랑스의 지중 해안에 머물며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명작을 계속 그렸다. 1950년부터 남프랑스에 영주할 것을 결심하고 프랑스국적을 취득하였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1957) 하늘의 창」은 그의 특유의 블루를 배경으로 한 하늘로 난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푸른 빛이 초현실적인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며 무중력상태의 하늘에 누워 있는 듯한 여인, 날개 달린 염소, 노란 닭 등이 신비롭다-
1952년 당시 60세의 샤갈은 유대인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리스로 여행을 하고, 전 아내 벨라가 죽은 지 8년 만에 다시 활력을 찾는다. 1960년 그는 에라스무스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당시 프랑스정부 내에서 샤갈과 친분이 있었던 앙드레 말로는 가르니에 궁의 천장화를 샤갈에게 요청한다.
이것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 샤갈은 1966년에 17점 연작『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정부에 기증했다. 앙드레 말로의 연작을 포함하여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니스 시가 토지를 제공하는 형태로 1973년, 화가의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샤갈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그의 무덤은 사후 주변 생폴드방스(Saint Paul)의 유대인묘지에 묻혔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1913~1914)_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맵시 있는 신사 차림의 피사체는 7개의 손가락으로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마무리 하고 있다 작품의 피사체인 화가가 그림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샤갈이 스스로의 걸작으로 꼽은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라는 점도 눈 여겨 볼 부분이다)-
그는 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성서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농부·산양·닭과 같은 제재를 많이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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