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왓트 여행

앙코르왓트(1)-공부하고 준비한 만큼 여행의 추억은 커진다

달리는 말(이재남) 2006. 10. 1. 08:53

-앙코르왓트 전경-

                                  -앙코르왓트 전경-

                                    -앙코르왓트 오르는 길(가파른 오름길은 힘이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

 

                               

공부하고 준비한 만큼 커지는 여행의 추억

 

여행은 떠남이며, 일상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분명한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을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행이란 소중한 일상을 보다 선명하게 실감하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롭고 고독할 때도 있다. 여행을 통해서 혼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어쩌면 그토록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여행에 대해 평소에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고, 준비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사람은 색다른 여행, 공부하는 여행, 의미 있는 여행을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고 돌아와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여행은 공부다. 공부하고 준비한 만큼 여행의 추억은 커진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가이드북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지만, 목적지에 도착 전 그곳의 역사와 유명한 문화적 명소는 다 알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여행전문가 한분은 여행가기 이전에 여행 기간의 세배정도 기간을 공부하라고 권한다.  책과 인터넷으로 접한 정보들이 간접경험에서 직접경험으로 바뀌는 쾌감은 공부하는 여행자만 느낄 수 있는 묘미라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시엠 립에 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동안 그곳의 역사와 기후조건, 역사적 유물에 관하여 공부하고 4월에 여행할 준비를 미리미리 해왔다.

 

캄보디아의 간단한 역사

 

캄보디아 면적은 18만 1040㎢,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1360만 7000명이다. 수도는 프놈펜이고 공용어는 크메르어이다.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남서쪽으로 시암만(타이만)을 접하고 있다.

우선 캄보디아의 역사에 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면,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 6세기까지 인도문명의 영향 아래 부남(扶南) 왕국이 번영하였다. 부남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이 부남을 병합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그 후 8세기 초에는 수진랍(水眞臘)과 육진랍(陸眞臘)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다시 통일하여,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앙코르왕국을 건설하였다. 앙코르왕국은 진랍의 전성기로 12세기 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 인도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등 거대한 건축물이 조영되었다.

앙코르의 전성기에는 인구 1백만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였지만 13세기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자야바르만 7세의 과중한 토목공사와 집권층의 부패로 점차 국력이 쇠퇴하였고 틈을 노리고 있던 태국의 야유타야족은 1431년 마침내 앙코르를 함락시켰다. 이에 앙코르왕국은 앙코르지역을 포기하고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겼다.

이후 태국의 영향을 받은 불교 스님들이 힌두교사원의 일부를 파괴하거나 불교사원화 하여 유지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앙코르 유적들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죽은 원주민과 몇몇 승려와 더불어 정글에 묻혀 전설의 왕국이 되고 말았다.

한편, 베트남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참파왕국을 붕괴시키고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타이,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코친차이나에 진출한 프랑스의 개입으로 1863년 타이를 물리쳤으나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90년 동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으며, 왕제(王制)는 형식적으로 존속되었다.

이 묻혀진 왕국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벗어나다가 1860년 프랑스의 여행가 앙리 무오에 의해 탐험되고 보고 된 이후 급격히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1908년부터 정글을 제거하고 부서진 건축물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노로돔 수라마리트 국왕 대신 19세의 노로돔 시아누크를 즉위시키고 한때 지배하였으나 1945년 3월 일본의 후원 하에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일본 패전 후 프랑스가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나 1947년 5월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왕국 헌법을 공포하여, 프랑스도 1949년 11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은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독립 후에는 사실상 노로돔 시아누크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55년 4월 왕정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사회주의 인민공동체(상쿰)」를 결성하고 왕위는 아버지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9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 상쿰이 의석 전체를 독점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다시 왕위에 올랐고, 독립 이후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유학파 지식인계층이 귀국하여 1963년 학생시위를 벌인 후 노로돔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조직화 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1년 타이, 1963년에 베트남,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정책으로 기울었다. 캄보디아는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보급로 설치를 허용하였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