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패션의 나라, 프랑스 일주여행

75.영국의 왕으로 즉위한 헨리2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2세

달리는 말(이재남) 2022. 3. 31. 07:30

카롤링거 왕조가 이후에 두 가문 사이에서 때때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곤 했던 권력 투쟁을 거쳐,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재위 987~996)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공작이며 파리의 백작이었고,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의 분파까지 포함하는 카페왕조를 창설하였다.

카페왕조는 800년이 넘는 세월동안 1792년 루이16세의 처형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911)에 의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이킹족의 두목 롤로에게 하사된 공작령인 센 강 하류의 노르망디 공국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오르세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1066년에 롤로의 후손 노르망디공작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재위 1066~87)프랑스왕실에게는 다루기 곤란한 지역이 되었다. 비록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공작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만, 프랑스 외부에서는 동등한 왕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루이7(재위 1137~80)와 이혼(1152)한 프랑스의 전 왕비인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공작 헨리 플랜태저넷과 재혼(1152)하였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이 다스리던 프랑스 서남부지역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1154년에 노르망디공작이 영국의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헨리2세이다. 헨리는 자신의 어머니인 마틸다를 통해 노르망디공국을 물려받았고, 아버지로부터는 앙주 지방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네 아들 중 세 명이 이끈 1173~1174년의 반란군이 패한 이후에, 헨리는 엘레오노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봉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임명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서부를 다스리게 된 그는 프랑스왕실보다 더 큰 힘과 더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클로도 모네의 작, Woods At Giverny, 887  35 78 x 38 12 inches (91.4 x 97.8 cm) Private collection-

클로도 모네(Claude Monet), 1868년,캔버스에 유채217×138.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루이 조아킴 고디베르 부인 장 모네도 쑥쑥 크고 있는 아들을 보며 삶의 환희를 누렸다. 이 시기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를 〈초록 드레스의 여인〉에 담았다.짙은 녹색 치마에 검은 모피(毛皮) 코트를 입고 걷는 순간을 포착-

 

그러나 헨리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의 프랑스영토를 분할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존 왕(재위 1199~1216)과 필리프2(재위 1180~1223)사이에 긴 분쟁과 논쟁이 얽히면서,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2세는 헨리2세가 프랑스 내에서 차지했던 영토의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부빈 전투(1214)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이후에, 영국왕실은 프랑스 남서부의 귀예네 공화국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이9(1214~1270)는 모든 이를 위한 공평한 정의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법정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나병환자를 치료하려고 시도하였다.

루이9세는 프랑스 왕 루이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쉬의 아들로 프와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루이9세의 통치기간동안 프랑스는 사회 전 영역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왕은 훌륭한 기사이자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다. 사후에 루이9세는 성자로 추앙되어,성왕 루이라고 불렸다.

 

-7천 년 전의 베제르 계곡의 가장 대표적인 몽티냐크 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