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일주여행

발칸반도 일주여행(21)-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달리는 말(이재남) 2015. 7. 3. 06:00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가판상점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시청사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모습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보석상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그 유명한 라틴다리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건설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기념하는 가지후스레프 베그모스크(가지후스레프의 비서들의 묘지)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보스니아정교회의 내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공화국의 코소보 주(州)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주민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해방군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지역에서의「인종청소」를 경고하여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 명에 이르러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하였다. 코소보지역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세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이 지역은 여전히 그 분쟁의 씨앗을 안고 있다.

여행을 시작한지 엿새째 되는 날, 아침은 6시에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준비를 하고 호텔 밖으로 나가니 비가 내리고 춥다. 7시부터 식사준비가 된다기에 레스토랑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8시40분쯤 오늘의 관광을 위해 김성용 목사님과 함께 호텔을 출발하였다.

예루살렘처럼 다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사라예보를 유럽의 예루살렘이라 한다. 보스니아는 그야말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나라다. 그 증거물로 사라예보 시내의 국립묘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국립묘지라고 하니까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를 생각하기 쉬운데 이 나라의 국립묘지는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에 속한다. 묘비가 종교별로 각각 다르다. 하얀색의 묘비는 이슬람권, 검정색의 묘비를 세운 곳은 기독교인들의 묘역이고 심지어는 무신론자들의 묘지는 그들 나름대로 한 곳에 구릅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으로 무려 4세기에 걸쳐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문화가 형성되었고, 헝가리로부터는 40년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문화가 형성이 되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나치독일의 통치를 피해 쫓겨 온 유대인들의 유대교, 심지어는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종교백화점을 이룬다.

한 가정의 책상위에는 코란과 성경책이 나란히 놓이는가 하면 한 가정에서조차 다문화, 다민족의 가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는 비극의 현장 라틴다리(Latin bridge)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보스니아 인들의 외세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표출이었다.

오스만튀르크로 부터 400년의 지배 후 1908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무력으로 완전히 합병했을 때 더욱 심각해졌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이 합스부르크 왕위 계승자인 프란 페르디난도 대공을 암살한 것이 제 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었다.

그 프란 페르디난도 대공이 죽은 자리가 바로 밀랴츠카 강가에 있는 이 라틴다리이다. 이 라틴다리를 걸어서 건너면서 설명을 듣고 기념사진 몇 컷을 찍었다. 이 라틴다리를 지나자마자 박물관을 세워 라틴다리에서 벌어진 내용의 화보 등을 게시하여 보다 나은 관광 상품화를 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