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타운의 Hout Bay 케이프타운의 Hout Bay
케이프타운의 Hout Bay 물개섬
케이프타운의 Hout Bay 물개섬 케이프타운의 Hout Bay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 만델라
만델라 그는 1918년 남아공화국 트란스케이에서 출생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당하게 차별대우를 받게 된 만델라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한평생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고 청년동맹과 민족회의를 결성해 저항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권운동의 투사이다. 그러던 그가 바로 빈곤과 질병, 무지 속에서 살아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준 사람이다. 44세 때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뒤 72세의 나이에 석방되었다. 그는 무려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철폐시킨 장본인이다. 흑백분리정책(아파르트 하이트)이란 이름을 내걸고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을 종식시켰고 흑인 다수사회인 이 나라의 백인통치를 끝내는데 결정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됐으며 또한 1994년에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넬슨 만델라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인들에 대한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그는「무욕(無慾)의 정치가」로서 그의 통치철학인「화해와 관용의 정치」를 앞세워 흑백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만델라는 국제사회의 논리와 입장이 아프리카의 이익과 주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카다피 리비아대통령으로부터 리비아 방문을 초대받은 만델라는 미국의 간섭에 쐐기를 박고. 트리폴리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에 맞설 용기가 있음을 분명히 과시했다. 만델라의 용기는 아프리카인들의 가슴속에 서방 강대국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정치가라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줬다. 그는 남아공에서 혁명대신 백인정권 지도자들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성취해 낸 탁월한 정치력과 도덕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 보다는 21명에 이르는 손자·손녀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10년 전인 90년 2월 11일 케이프타운 인근 빅토르 버스터 감옥에서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는 자유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던 중요한 전기였다.」고 밝혔다. 그는 백인 소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으나 인종차별제도 아래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의 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만델라에 대한 사면발표는 소수 백인통치의 종말을 예고한 것이었으며 그는 94년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석방 당시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싸워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빅토르 버스터 감옥에서 석방시켜줘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고 회고했다. 당시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프리토리아에서 조용히 석방시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려고 했다. 만델라 그는 「나는 빅토르 버스터에서 석방되기를 원했으며 이문제로 우리들은 약 6시간동안 논쟁을 벌였다.」면서 「나는 사람들이 나를 빅토르 버스터에서 맞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며 마침내 그가 빅토르 버스터에서의 석방에 동의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석방 당일 이른 아침 만델라는 당시 부인이었던 위니의 손을 잡고 감옥의 정문을 걸어서 나왔으며 수만 명의 지지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만델라는 석방 10주년 기념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인종차별을 극복한 것은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이들은 서로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함께 뭉쳐서 이뤄 내야할 더욱 많은 일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모두를 같은 운명을 지닌 하나의 국가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후트 만(Hout bay)의 「seal island(물개 섬)」을 향하여
버스를 타고 캠스 베이로부터 계속하여 더 달리니 후트 만(Hout bay)에 도착된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Hout Bay까지 내려가는데 해변을 따라 펼쳐져 있는 백사장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 도로를 따라 줄줄이 이어진 가옥들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이 지역은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장소로서 물개 섬에 가려고 Hout bay에서「Circe launches」라는 유람선에 승선했다. 케이프타운의 아름다운 항구 중 하나인 후트베이(Hout bay)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호화보트가 정착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seal island」, 물개서식지 탐방에 나선 것이다. 포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15여분 거리의 물개 섬으로 항해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치면 갈수 없다고 했는데, 이날은 심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때문에 파도에 부딪히면서 선체가 많이 흔들려 배 멀미를 하는 승객도 눈에 뜨였으나 다행하게도 이 배는 항해를 계속했다. 조그마한 물개 섬에 도착해, 갈매기 떼와 어울려 널브러져 있는 5000여 마리의 물개를 만날 수 있었다. 섬이라기보다는 두개의 평탄한 바위자락인데, 수십 마리씩의 암컷 물개에 둘러싸여 있는 수컷의 모습이 이채롭다. 「섬 주변엔 모두 5000여 마리의 물개가 살고 있다.」는 한국말 선상방송이 흘러나와, 한국 관광객들을 잘 이해시키고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방송가운데는 물개를 잡으면 벌금을 엄청나게 물린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조그마한 섬에는 그야말로 빈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떼를 지어 누워있거나 근해에서 수영솜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헤엄을 즐기고 있는 물개를 향하여 기념사진을 찍으랴 즐거운 볼거리를 보랴 바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Circe launches」를 타고 물개 섬을 돌아서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를 환영해 주려는 사람들이 있어 마냥 즐겁게 해준다. 우리가 승선한 배를 선착장에 바짝 붙이고 내리려는 우리를 향하여 6인조 밴드가 노래를 부르며 요란스럽게 몸을 흔들어대면서 흥을 돋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