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여행

생명력이 넘치는 아프리카(20)-잠비아의 어려운 경제사정

달리는 말(이재남) 2014. 11. 5. 06:08

 

빅토리아 폭포를 처음으로 발견한 영국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동상(잠비아국립공원)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의 여러가지 모습

 

                                                                               
잠비아의 어려운 경제사정

 


잠비아는 구리 생산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단일상품경제로 구리가 국내총생산의 45%, 국가세입의 61%, 수출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독립 후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1968년 무룽시 선언을 발표했다. 주요 외국계 민간기업 26개사에 대하여 국영산업개발공사가 51%의 주식을 가지기로 하는 동시에 본국으로의 송금을 제한했다. 1969년 기간산업인 동광업에 대해서도 국영광업개발공사가 51%의 주식을 차지했다.
그 때까지 2대 외국계 구리회사였던 론셀렉션트러스트사(社)는 론콘솔리데이티드광산회사에, 앵글로 아메리카사는 응창콘솔리데이티드 동광산회사에 이양되었다. 1970년 외국상업은행을 대신하여 국영금융개발공사가 과반수 주식을 차지해 정부는 금융활동의 95%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경제의 잠비아화가 이루어졌으나 구리의 반출 로와 국제가격 변동으로 인해 잠비아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 1965년 11월 이웃나라 짐바브웨의 백인 세력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 때 그것에 대한 국제연합의 경제제재조치에 협력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구리 수송의 2/3를 의존하고 있던 로디지아철도의 사용이 어렵게 되어 대체 노선을 모색하였다. 1970년 중국이 탄자니아와 구리광산지대를 연결하는 1600㎞의 탄잔철도건설에 나서 1975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8월 앙골라에서 내전이 일어나 로디지아철도와 더불어 주요 수송로였던 벵겔라철도가 파괴되어 구리 수송은 탄잔철도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철도의 수송효율이 나쁘고 항구의 하역 능력도 낮아 구리 반출은 위기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1973년 석유파동 후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1975년 이후 구리의 국제가격이 하락하여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구리회사에 생산제한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잠비아의 외화는 줄어들고 생활필수품 수입도 줄어들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여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동시에 1978년 10월에는 프론트라인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디지아철도사용을 재개했다. 이처럼 문제를 안고 있는 구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반성한 정부는 현재 국내 농업을 개발하여 식량 자급화에 힘을 쏟고 있다.
철도 주변의 시장을 상대하는 백인농장이나 국영농장과 그 밖의 아프리카인 자급자족농업지역과의 지역격차가 크기 때문에 정부는 아프리카인 자급농장에 한하여 관개시설과 종자·비료 등을 원조하여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주민은 73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부족은 중남부의 통가족, 동부의 난자족, 북부 고퍼벨트의 벰바족, 북서부의 룬다족, 서부의 로지족 등이다.
공용어는 영어이며 기타 각 부족어도 사용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전통적 종교를 믿고 있으나 도시에는 그리스도교도가 많다. 이러한 지역격차가 원인이 되어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률은 대단히 높다. 인구의 도시화 율은 1970년의 30%가 1993년에는 42%로 늘어났고, 실업자의 증대, 주택난, 의료와 교육시설이 모자라는 등 심각한 경제·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경제의 잠비아화와 함께 아프리카인 임금노동자수가 37만 2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기술직·행정직·관리직 등은 여전히 외국인 의존도가 높아 그 임금격차를 둘러싼 노동쟁의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또한 급격한 잠비아화 정책은 반대로 국영공사에서의 비능률과 비효율을 야기해 1977년 산업개발 법을 제정, 외국 민간자본 투자에 대해 우대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국영공사의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독립할 무렵의 대학졸업자는 불과 10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뒤 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어 해마다 세출 액의 14%, 국내총생산액의 5%를 투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