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여행

생명력이 넘치는 아프리카(17)-케냐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 그리고 정치

달리는 말(이재남) 2014. 10. 31. 05:33

 

아프리카 케냐의 식물

케냐 나이로비의 Nyayo 국립운동장 

나이로비의 카렌 브릭슨 박물관

나쿠르국립공원의 훌라맹고 

나쿠르국립공원의 입구

마사이마라국립공원의 누우떼들

암보셀리국립공원과 킬리만자로의 설경

 

                                           
케냐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 그리고 정치

스와힐리(Swahili)어로 「사파리」라는 단어는 케냐와 거의 같은 뜻으로 케냐가 매년 많은 외국관광객들로부터 각광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몇 년간 항공요금 등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케냐는 동아프리카의 제일의 관광생산지로 자리 잡았다. 케냐는 천년간 사람들이 이주하는 주요도로의 역할을 해왔다. 최초의 이민의 물결은 에티오피아로부터 두 번째로 동부사람들이 서기 1000년경에 애티오피아의 유목민들 뒤를 따라 케냐중앙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0세기 중반까지 영국과 독일은 동아프리카지역을 장악하는데 의견을 모았고, 10세기 말에는 Massai부족 사람들은 아주 약해졌고 두 반대세력인 Llmassai와 Lloikop사이에서의 수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그들의 인구수는 줄어들었다. 또한 1880~1892년 사이 콜레라, 홍역, 굶주림 같은 많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케냐의 초대 대통령인 케냐타(kenyatta)는 나이로비 북부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1892년에 태어났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선전활동 비서로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지역개혁, 임금인상, 교육 그리고 의료시설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벌이는데 참여했다. 또한 흑인과 백인사이의 불공평들을 해소하는데 Kikiyu 중앙 협회의 비서로써 많은 노력을 기여했다. 그러나 케냐타와 다른 임원들은 반대운동 등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는 주동자였기 때문에 7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옥살이를 하다가 1959년에 출감되었다. 케냐의 독립은 1963년 12월 20일 초대 대통령 케냐타에 의해 실현되었다. 케냐타 대통령 그는 1978년 임종 때까지 케냐를 통치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케냐는 아프리카의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한 나라 중에 하나로 성장했다. 1978년 독립의 아버지인 케냐타 대통령의 사망으로 모이 부통령이 대통령 직을 승계하게 된다.
1982년 개헌으로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이 1당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나 1990년 들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1991년 12월 모이 대통령은 다당제 도입을 허용하였다. 2002년 12월 만 24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연합체인 전국레인보연합(NARC)의 M. 키바키 후보가 당선되면서 39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케냐의 경제·산업, 사회문화, 언어

독립 후 10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6.7%에 이르러 블랙아프리카에서 최고였다. 그러나 석유위기 및 그 뒤의 커피가격 하락, 가뭄, 인구 급증 등으로 1970년대 후반 이후 경제성장률은 큰 폭으로 둔화되고 있다. 산업 중심은 2000년을 기준하여 국내총생산(GDP)의 19.9%를 차지하는 커피 등의 농업이다.

농업은 종래 대농장과 소농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독립 후 화이트 하이랜드의 300만 ㏊나 되는 광대한 토지를 아프리카인에게 분할하는「100만 에이커계획」과 「스쿼터계획」으로 소농 육성에 힘썼다. 농산물은 케냐 수출의 67%를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커피는 2001년 생산량 7만 5000톤에 이르러 농산물수출 제2위, 차는 소농이 70%를 생산해 제1위를 차지하였다.

주요 수출상대국으로는 영국·독일·네덜란드가 있다. 유럽 상대의 과실·야채의 수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무공해 방충제로 수요가 높은 벌레를 제거하는 농약도 세계생산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사이잘삼(麻)·목화·사탕수수 등의 상품작물, 옥수수·카사바·고구마·콩류 등의 자급작물 재배면적이 크다.
목축도 활발해지면서 2001년을 기준하여 소 1250만 마리, 염소 900만 마리, 양 650만 마리를 사육하며, 육류제품·피혁류 수출도 많아졌다. 한편으로는 경공업도 발달되어 GDP의 12%를 차지한다. 식품·음료·담배 부문이 전체의 30%를 차지하는 외에 자동차부품·화학·석유·섬유·구두·직포 등 공업이 활발하다. 몸바사에 입지한 석유정제 업은 수출 제2위를 차지한다. 공업은 우간다·탄자니아 등 이웃 여러 나라로 수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서비스부문에서는 관광수입비중이 크며, 2000년 2억 5700만 달러의 외화수입을 올렸다. 무역은 2002년 수출 21억 달러, 수입 30억 달러로 수입초과가 크다. 수입품목은 원유·산업기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요상대국은 사우디아라비아·영국·일본 등이다. 부족 저마다의 문화에 고유한 전통적 생활양식도 강하게 남아 있다. 햄계 마사이족은 사바나자연에 의존한 목축문화를 지키고 있다. 북부건조지대에서는 렌딜레족과 투르카나족 등 낙타·소 유목민의 전통적 생활·문화가 근년의 가뭄으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케냐의 공용어는 영어이며 국어는 스와힐리어로 몸바사 등 인도양연안의 코스트 스와힐리와 나이로비 등 고원지역의 업 컨트리 스와힐리에 저마다 공통어로 보급되어 있다. 그 밖에 키쿠유족과 루오족 등 유력한 부족의 언어도 전파되어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에도 17종의 언어가 쓰이고 있다.
의무교육은 7년이며, 4년까지 무료이지만 1999년 문맹률이 18%로 높은 편이다. 나이로비대학·케냐공과대학·케냐타농과대학이 있다. 독립교회 등 그리스도교의 많은 종파가 활발히 활동하여 주민의 80%가 그리스도교도이다. 이슬람교는 해안지역과 북부 건조지역에 전파되었는데 나이로비 등 도시에도 모스크가 세워지고 이슬람교도는 주민의 7%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