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여행

생명력이 넘치는 아프리카(19)-짐바브웨의 잠베지강 유람선

달리는 말(이재남) 2014. 11. 4. 06:15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

짐바브웨의 잠비지강의 유람선을 타고

짐바브웨의 잠비지강의 유람선을 타고

짐바브웨의 바오밥나무

짐바브웨의 바오밥나무와 그 나무의 열매 

 빅토리아폭포를 처음 발견한 영국의 데이비드 리빙스턴 동상(짐바브웨의 국립공원)

짐바브웨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

짐바브웨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폭포

 

                                                     
 짐바브웨의 잠베지강 유람선

 


어느덧 계획된 여행일정의 반이 훌쩍 지나갔다. 집을 떠나 온지 8일째 되는 날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이 즐겁기도 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5시 반에 모닝콜이 있었다. 6시 반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반에는 짐을 호텔 셔틀버스에 싣고 안스마츠국제공항을 향하여 달렸다. 공항에서는 먼저 붙일 가방의 무게를 달고 그 증명서를 받아 짐을 부치게 된다. 출국수속을 마친 우리는 28번 게이트에서 9시 4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짐바브웨의 빅토리아국제공항에서 내렸다.
공항에 내려 1인당 미화 30불을 비자피로 지불하고 입국비자를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려니 영어가이드인 Stanlly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에 태우고 Rainbow 호텔로 안내하여 12호실에 체크인 했다. 일단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케냐에 비해 더운 기온의 차가 느껴온 때문이다. 일행은 다시 모여 버스를 타고 빅토리아폭포를 관광하기 전에 잠베지 강의 유람선을 타고 크루즈를 시작하였다.
악어와 하마 떼가 우글거리는 곳, 잠베지 강 유람선에서 타조고기 야채, 그리고 빵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포도주, 맥주를 마시고 싶을 만큼 마셨다. 포도주와 맥주를 마신 탓인지 일행은 흥에 겨워 선원들과 함께 춤판을 벌려 한때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유람선에서 내린 일행을 싣고 짐바브웨의 국경선으로 달려가 출국수속을 하는데 20여분의 시간이 소요됐다. 물론 영어가이드인 Stanlly와 운전사가 출입국관리소에 들어가 일괄적으로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잠비아의 출입국관리소에 들어가 비자 피, 1인당 미화 10불씩을 지불하고 입국비자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짐바브웨의 국경선 부근에 세워두었던 전용버스는 국경선을 통과하여 잠비아 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잠비아의 지리적여건과 역사 그리고 정치

남부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나라로서, 정식명칭은 잠비아공화국(Republic of Zambia)이다. 독립 전에는 북 로디지아라 불렀다. 국토면적은 75만 2614㎢, 인구는 2003년을 기준하여 1031만 명이다. 북쪽은 탄자니아와 콩고민주공화국, 동쪽은 말라위와 모잠비크, 서쪽은 앙골라, 남쪽은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접하고 있다, 전국토가 해발고도 900~1500m의 고지대이며 남쪽 짐바브웨 국경에는 잠베지강이 흐르고 있다.
북부의 므웨루호, 방궤울루호와 남부의 카푸에인조호, 카리바인조호 등 호수와 늪 외에도 중부에 루캉가 늪지대가 있으나 대부분은 지대가 높은 사바나지역이다. 동·남부 철도를 따라 있는 적색·적갈색 롬층지대에는 백인들에 의해 상업성을 띤 대농장이 발달되어 있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급자족용 농사를 짓고 있다.
1889년 C.J.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회사는 림포포강 북쪽으로의 진출을 꾀해 지금의 짐바브웨를 차지한 뒤, 1890년 잠베지강 상류 로지왕국의 레와니카왕으로부터 광물채굴권을 받아냈다. 그 뒤 1997~1999년 북방 벰바 족을 응고니 족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북 로디지아에 두었다. 그러나 회사의 관심은 남 로디지아(짐바브웨) 광산자원과 백인 개척농장에 있었으므로 북 로디지아에서는 1909년 카탕가로 통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1920년대 초 백인개척자의 회사 지배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1924년 회사 지배는 끝나고 식민지부(府)가 통치하는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북 로디지아가 남 로디지아로부터 구별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1920년대 말 코퍼벨트에서 구리 광산이 발견되어 미국계 론셀렉션사(社)와 남 아프리카계 앵글로 아메리카사가 채굴을 맡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전 세계 구리 생산고의 1/8을 차지하기도 했다.
남 로디지아 백인 개척자는 이 구리 자원에 눈독을 들이는 동시에 지금의 말라위, 니아살랜드의 흑인 노동력에도 관심을 보여 남 로디지아, 북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3국으로 연방을 결성하기로 계획을 세워 1953년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이 수립되었다. 백인의 이익을 꾀하는 연방에 대해 3국의 아프리카인들은 반대하였으며 북 로디지아에서는 1951년 H. 응쿰불라가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결성하였는데 K.D. 카운다도 이에 합세하였다.

1958년 급진적인 카운다는 탈퇴하여 신당을 결성하였으나 비 합법화되어 투옥 당했다. 1960년 통일 민족독립당 당수가 된 카운다는 연방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면서 영국 정부와 교섭해 1963년 12월 로디지아·니아살랜드연방이 해체되었고 1964년 10월 24일 독립해서 북 로디지아는 잠비아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대통령이 된 카운다는 독립 직후 서부바로체랜드 정부에 불복종하는 사람과 북부의 광신적 그리스도교도 A. 렌시나의 무력봉기를 억누르고 1970년 국내 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야당 ANC를 비 합법화했다.
또 1972년 민족독립당에서 제명된 카브웨브웨 연합진보당도 비 합법화하고 일당독재체제를 만들기 위해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추진했다. 이 초안은 12월에 가결되었고 1973년 5월 새 헌법이 공포되면서 잠비아는 「인도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는 일당독재제 민주주의」를 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