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토,북해도 일주여행

일본 본토와 북해도 일주(15)-동경 오다이바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26. 18:04

 도쿄 황궁의 설경

 황거의 아름다운 모습

 도쿄 황거 근처의 아름다운 건물

 도쿄 황궁의 입구

 도쿄 하비아공원의 모습

 요코하마의 아름다운 야경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 



                                                                     동경 오다이바


오다이바는 동경만 지역에 세워진 거대한 타운이다. 최신식 쇼핑 타운과 어뮤즈먼트, 호텔, 방송국과 박람회장등 다채로운 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개념의 리조트식 타운이다. 동경에서 최근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다. 이 오다이바가 새로운 도심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가 있다. 「다이바」하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 설치된 포대에서 시작된다. 1853년 아메리카의 페리제독이 4척의 군함을 끌로 와서 물자와 연료의 보급을 요구하지만 당시 일본은 쇄국정치를 하던 때라 페리제독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페리제독은 다시 찾아 올 것을 막부에 전하고 막부는 황급히 대비태세를 갖추어 도쿄 만에 12개의 포대를 만들기로 결정하지만, 1년 뒤 페리제독이 다시 찾아왔을 때 포대는 겨우 3개만이 완성되었고 자금난으로 공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페리제독으로 인해 쇄국정치의 막을 내리고 개항하게 되었고 포대가 있던 지역은 차츰 매립되어 현재와 같이 수도 도쿄의 미래형 신도심인 오다이바로 성장하게 된다.
동경 하네다 공항에서 모노레일로 심바시역에서 내려서, 오다이바를 연결하는 모노레일(유리카모메)로 바꿔 타고 이용할 수 있다. 1일 프리패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배낭여행객이나 오다이바의 여러 역을 이용하려고 하는 관광객은 이 패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아오미역에 하차하면 팔레트 타운, 비너스포트, 선워크로 이동하기 편리하며, 다이바역에 하차하면 아쿠아시티에 장난감백화점 TOYS'R'US, 덱스도쿄비치등 다양한 볼거리와 쇼핑점이 입주해 있으며, 방송국과 근교에는 동경최대의 박람회장인 빅사이트가 있다.

세계 유수의 전시회와 박람회가 여기서 열린다. 린카이센 도쿄텔레포트에서 덴즈노아일로 가면 하네다 공항으로 모노레일을 타고 20분정도 소요된다. 또한 수상버스와 페리인 쿠로센 등으로도 왕래를 할 수 있다. 오다이바의 명물로는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그대로 조각해 놓은 동상과 멀리 해변공원에서 보이는 레인보우브리지를 사진으로 담아도 너무나 아름다운 지역이다. 일본인들은 물론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쇼핑과 어뮤즈먼트를 즐기기 위해 찾고 있는 곳이다.


                                                                                       일본의 근대사


메이지시대에는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해외에 건물사절단과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으며, 서양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근대화된 제도와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서구의 과학문명이 도입되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1870년대 중반 이후 자유민권운동과 입헌 주의적 헌법제정, 국회개설 요구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메이지정부는 1880년대 이후 내각제도, 관료제도, 경찰기구정비, 교육제도개혁, 지방제도제정을 추진했고, 1889년 메이지헌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다.
메이지헌법은 국가의 최고권한을 천황에게 귀속시켜 천황을 절대군주이자 유일주권자로 규정한 흠정헌법이며 천황의 절대권한은 학교교육을 통해 가족국가관과 신민교육이 추진되었다.
메이지정부의 부국강병과 근대화정책은 의회 내의 민권파 계열인 야당의 반대와 재정적 궁핍으로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하게 되자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계기가 된 것은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을 식민지화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게 되면서 메이지정부는 이 보상금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산업설비를 도입하였으며, 서구 열강과의 대외무역거래에 필요한 금본위제 실시에 필요한 기금을 충당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세계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고 자본주의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면서 1902년 만주를 점령하고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만주지배권과 조선의 지위에 해단 우선권을 놓고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지역에서 제국주의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군수산업과 해운조선업도 급속히 발전했으며, 광업에서는 석탄과 동 생산이 활발해지고 국내와 해외식민지의 철도가설이 확대되면서 철도산업도 급격히 성장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제혼란과 정당정치의 부패로 정치혼란이 거듭된 일본사회에 1929년의 세계공황의 여파는 일본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야기했다. 물가하락, 수출격감, 기업도산, 농산물 가격하락, 소작쟁의의 격증 등으로 일본경제와 사회의 혼란은 격화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군부는 1930년대 들어 정당내각의 의사와 상관없이 단독행동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미, 영국과 진행하던 해군 군축회의에서도 탈퇴했다. 일본의 정치구도가 군부가 전면에 나타나는 군국주의체제로 전환되면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경제는 계획경제 및 종제경제체제로 전환되었으며, 1938년에는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입하여 점령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침략을 거행하면서 북방의 위협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자, 일본육군을 중심으로 대 소련 공격주장이 제기되었다. 그해 7월에 베트남을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고무 등의 전략물자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미국 내 일본인 자산의 동결과 대일 협상에서도 강경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1일 천황이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전략물자 확보를 위한 말레이반도 침략과 미국의 태평양함대 전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진주만기습을 결정함으로써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은 열세로 돌아서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8일 대일참전이 결정되자 일본은 포츠담선언에 규정한 항복조건을 무조건 수용하면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은 1948년 중반까지는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책이 기조를 이루어왔으나 유럽에서 동, 서간 냉전이 격화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될 가능이 커지면서 일본을 자유주의진영 국가로 편입시켜야만 하는 전략적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에 대한 경제지원이 강화되었고,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한 규제 또한 강화되는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경제는 전쟁특수로 급격히 1950년대 후반부터는 고도성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