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여행

23.히틀러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18. 16:00

히틀러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화장실에 잠깐 다녀오자 곧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렸을 게다. 크라카이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는 폴란드에 게토라는 유태인 특별거주지역을 만들고 모든 유태인들을 그곳에 수용했다. 나치 친위대 사령관 히물러와 아우슈비츠 학살 책임자였던 헤스와 공모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었다.

폴란드어로는 「오쉬비엥침」이라고 부르는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빨간 벽돌건물들로 전체 28동으로 되어있으며, 추산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 시체를 태웠던 소각장 온갖 유품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t(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씌어 있다.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는 1,2,3 수용소가 있는데 현재 제1수용소는 학살을 알리는 박물관으로, 제2수용소는 독일 군이 후퇴하며 폭발시켜 터만 남아 있고, 3수용소는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영화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등에서 잘 묘사된 곳이다.

 

폴란드 유태인 수용소(아우슈비츠)-면도용 부러쉬 및 머리빗들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은 폴란드의 공업도시 그다니스크에 침공을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독일은 서기 1400년경 폴란드 군과 싸워 대패한 후 폴란드 때문에 번번이 동진 정책을 포기해왔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인근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시켰다.곧 폴란드에게도 병합을 강요했지만 폴란드가 응하지 않자 독소조약을 맺고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얻게 되는 땅 절반을 소련에 나누어주기로 약속한 조약이 바로 독소조약이다.

 

학살된 600만 명의 유태인

 

독일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이 죽었다는데 이중 학살된 사람이 2천만 명이며 유태인으로 학살된 사람이 600만 명이나 된단다. 이 가운데 350만 명이 이곳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당했다. 당시 유태인들은 오쉬비엥침 기차역에서 내려 수용소에 수감되었거나, 샤워를 시키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바로 가스실로 들여보내 죽였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면 샤워를 해야 한다며 기차에서 내리는 즉시 거의 대부분 가스실로 보냈다고 한다. 가스실에서 학살된 유태인들은 머리카락이 잘리고 의족, 이빨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찾아낸 후 시체는 바로 화장장으로 보내 그들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폴란드 유태인 수용소(아우슈비츠)-당시의 구두약통       

폴란드 유태인 수용소(아우슈비츠)-그때 당시의 최고가의 법낭 그릇들


최대 수용시설이 있던 제2수용소에는 53만평에 막사만 300개가 넘었는데 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폭파시켰으나 수용소 규모가 워낙 커서 모두 폭파시키지 못해 남은 건물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수용소에는 가스실이 4개가 있었는데 한 가스실에 2천 명씩 한꺼번에 8천명을 죽였다고 한다. 가스실에 사용했던 살인 가스는 「사이클론」이라는 독가스로 상온에서 27℃이상 올라가면 고체가 기화되면서 독가스가 된다고 한다.

이 가스에 노출되면 10∼15분 안에 모든 생명체가 죽게 된다. 독일은 이 가스를 폴란드로 가져올 때 폴란드에 쥐가 많아 쥐를 잡는 약이라고 속여 가져왔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머리카락은 직물이나 매트리스를 만드는데 사용했고 유태인들이 갖고 온 물건들은 유태인 노역자를 시켜 분류, 귀중품은 장교들이 착복하고 나머지 물품들은 전쟁물자 수급에 사용했다고 한다.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안경, 신발, 의족, 옷, 어린이나 유아용품들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어서 나치독일의 만행들을 수용소 견학을 통해 보고 알 수 있었다. 이곳을 관광할 때는 웃거나 떠들지 말아야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수용소의 구경을 마쳤다. 아우슈비츠는 지금 약 5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폴란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폴란드 유대인들을 수용했던 아우슈비츠수용소 건물끝 망루


식사를 마치고 또 전용버스로 타고 달렸다. 2시간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체코로 넘어가는 국경선 경비초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여권의 사진과 실물의 대조만으로 출입국 절차를 끝내주어서 금방 국경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국경을 통과하면서 영화 「피아니스트」를 감상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출신 피아니스트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서부터 끝나는 날까지 겪는 과정을 그려놓은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2003년도 아카데미 영화상을 받은 작품인데 폴란드에서 만든 영화다.

국경선에서 3시간가량 더 달려서 체코의 제2도시인 브르노에 도착하였다. 나무가 우거진 전원도시다. 브르노의 호숫가에 자리 잡은 Santon hotel에 Check in하여 짐 가방을 풀은 시간은 저녁 8시다. 잠시 후 2층의 레스토랑에 올라가 체코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오늘하루의 여행기를 정리하고 났더니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내일의 일정을 위하여 휴식을 겸한 잠을 자야겠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중앙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