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러시아여행

20.프로그네르공원으로 불리는 비겔란조각공원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17. 21:46

 

                               노르웨이 비겔란조각공원 모노리트

 

프로그네르공원으로 불리는 비겔란조각공원


바이킹의 역사와 바이킹박물관


몇 시간을 달렸을까? 전용버스가 오슬로의 외곽에 위치한 바이킹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은 11시20분이다. 오슬로의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 등 3척의 바이킹 선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곳이 바로 바이킹박물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설명하는 해설자

 

바이킹의 어원은 원래는 8세기 말~11세기에 걸쳐 고국 땅인 스칸디나비아에 서 덴마크에 걸쳐 많이 있는 협강(vik)에서 유래한 말로 「협강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전투, 성채화 된 숙영지,·해적(viking)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무렵에 그들이 각지에 진출한 원인은 협소한 땅덩어리에 인구가 자꾸 늘어나므로 새로운 땅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감행한 제2의 민족 대이동이랄 수 있다.

이때의 노르만민족은 씨족제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진행하여 국가형성기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부족간의 다툼이 늘 있어왔는데 뜻을 이루지 못한 족장이 부족민을 인솔하여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진출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갈망하였다. 바이킹들은 당시 무자비한 침입 ? 싸움 ? 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 지역의 공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민족이동뿐 아니라 전투, 정복, 탐험식민, 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초래하였다. 근년에 유적, 유물의 발굴과 조사 및 여러 과학의 총합적 연구에 의해 파괴적인 바이킹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당히 수정되어, 중세 유럽사의 전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장대한 운동으로 보인다.

 

북대서양을 횡단한 바이킹들

 

바이킹 시대는 서기 800년쯤부터 비롯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만 사람들 중에 모험과 싸움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그들은「해적」을 의미하는 바이킹이라고 불리고, 그 바이킹들은 배 타는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다. 그들은 해적을 통해 얻은 경험을 십분 살려 갑자기 쳐들어갔다가 잽싸게 도망칠 수 있는 날쌘 배를 제조하였다.

노르(Knorr)라고 불린 이 배는 길이 24m,너비 5m로 바이킹 44명과 말 두 필을 실을 수 있었다. 네모꼴 돛에 바람을 잔뜩 머금고 높은 파도를 매끄럽게 헤치는 이 배를 유럽 사람들은 「긴 배(Long Ship)」라고 부르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바이킹 가운데 한 무리는 북대서양 서쪽 바다로 나아가, 차가운 파도와 안개를 헤치고 아이슬란드에 닿아 거기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 무렵 머리카락이 붉다고 해서 「붉은 에릭(Eric the Red)」이라고 불린 인물들이 바이킹 역사에 등장한다.

붉은 에릭은 살인죄를 짓고 아이슬란드로부터 3년간 추방되어 서기 982년 서쪽으로 800㎞쯤 항해해 처음 보는 육지에 닿았다. 그는 3년 동안 그곳에서 머무르다 아이슬란드로 되돌아가, 자기가 발견한 땅이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내고 다녔다.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그는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그 땅을 숲이 우거진 초록빛 땅을 의미하는 그린란드(Greenland)라고 선전하였다. 붉은 에릭이 이끄는 긴 배 25척이 서기 986년 아이슬란드를 떠났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14척만이 그린란드에 닿을 수 있었다. 바이킹은 이곳에 마을을 이루었으며, 노르웨이를 오고가며 털가죽 장사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란드에는 농장이 300군데 이상 생겼으며, 인구는 4,000명으로 늘어났으나 이들은 그 뒤로 500년쯤 번성하다가 14세기 말에 흑사병이 휩쓸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무렵 그린란드의 바이킹 중에 뛰어난 지도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주 크고 힘이 세며, 잘생기고 모든 일에 공정한」 이 행운아는 붉은 에릭의 아들 에릭손이다. 모험심을 주체하지 못하던 에릭손은 서기 1001년 배를 타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아메리카의 북쪽은 그린란드와 아주 가깝다.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데이비스 해협의 너비는 겨우 320㎞,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사이 2400㎞ 뱃길을 오가던 바이킹으로서는 ⅛밖에 안 되는 거리여서 아주 손쉬운 항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릭손은 처음 발견한 배핀 섬을 「평평한 돌의 땅(Helluland)」이라고 이름 지은 다음에도 계속하여 남쪽으로 항해해 나아갔다. 에릭손은 또 풀이 우거지고 모래가 곱게 깔린 땅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숲의 땅(Markland)」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아마도 오늘날의 래브라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에릭손은 이틀 동안의 항해를 계속해 나아갔다. 세 번째로 발견한 땅, 그곳이 바로 랑즈 오 메도였다. 푸른 풀밭과 무성한 숲, 강물에 넘치는 연어 떼가 바이킹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에릭손은 그곳을 빈란드라고 부르고 그곳에 정착할 집을 지었다.1년이 지난 어느 날 에릭손이 그린란드로 돌아가자 그의 동생 토르발트가 바이킹 30명을 이끌고 빈란드로 건너갔다. 그곳에 정착해 살던 토르발트는 어느 날 생전 처음 맞닥뜨린 이상한 사람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

자기 땅을 지키려고 찾아온 그곳 토박이 종족 스크랠링 인디언들이다. 이 전투에서 토르발트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그 이후 찾아온 칼세프니와 에릭손의 누이동생 프레이디스 등도 빈란드를 바이킹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그 후 어느 때부터인가 빈란드는 바이킹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학자 가운데 어떤 이는 빈란드에 살던 바이킹들이 인디언에 동화해 아메리카 토박이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들이 모두 인디언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에서 바이킹의 역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자기네보다 월등히 많은 인디언을 물리칠 인원이 없었다는 문제점을 들 수 있다. 기동성이 뛰어난 바이킹의 좁고 긴 배는 치고 빠지며 노략질하는 데에는 알맞았겠지만, 사람을 44명밖에 태우지 못해 그린란드로부터 사람을 많이 수송해 오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바이킹은 「쇠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싸워서 진 적이 없다.」고 알려진 진리가 유일한 예외가 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스크랠링 인디언은 아메리카 인디언 역사에서 유일하게 유럽인의 침입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종족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 바이킹박물관


결국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도 아메리카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바이킹이 무사히 미국대륙에 정착하였더라면 그 이후 세계사는 오늘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면 후세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오슬로의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 등 3척의 바이킹 선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배 가운데 가장 크고 우아한 오세베르그호는 9세기 초에 건조된 것으로 35명의 노를 젓는 사람과 돛을 이용해 항해했다고 전해진다.

오세비르그 호에서는 각종 장식품과 부엌용품과 가구류가 발견되었으며 50년 정도 사용된 후 오사여왕의 관으로 사용되었다한다. 9세기에 만들어진 고크스타호는 32명의 노를 젓는 사람과 돛으로 향해한 전형적인 바이킹 선으로 12마리의 말과 6마리의 개, 짐승머리로 장식된 침대, 3척의 보트 등이 발견되었단다.

투네호의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대부분 부패된 채 발견되었으며 배의 이름은 발견된 지명을 따서 붙여졌다고 했다. 이곳을 관람하고 나온 일행은 시내 가까운 곳의 교포가 운영하고 있는 「코리아나 레스토랑」에서 한식 된장국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이 있는 조각공원에 갔다. 프로그네르공원으로 불리는 비겔란조각공원은 193점에 이르는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으로 총면적 8만평에 조성되어있는 공원이다.  

세계적인 바겔란 조각공원

노르웨이의 세계적인 바겔란조각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