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터키 여행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31)-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

달리는 말(이재남) 2005. 9. 24. 09:36

터키의 카파도키아(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아내는 타쉬켄트 공항에서 찬 몸으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몸에 이상을 느끼는 모습이다. 한 참 동안 지압을 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더니 조금씩 좋아졌고, 결국 피곤하긴 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인천공항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려는 지금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두 나라를 관광했는데 그 관계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터키인들은 유목 민족만의 대륙적인 기질과 오스만제국과 같은 대 제국의 국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남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는 민족답게 자존심이 강하고 당당하며, 용감하며,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에 우호적이며 적극적이다. 오스만제국 당시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터키인의 민족성이 아닌 오스만제국 사람들의 국민성만이 존재했으며, 이 오스만제국의 다민족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터키인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스의 에렉티온신전

 


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든지,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 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 징세정책의 일환으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18세기 이후 베네치아의 쇠퇴에 대신하여 그리스의 상인들은 흑해? 지중해에서 활약하게 되어 마침내 강력한 선박대(船舶隊)와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후의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의 에게해


또한 17세기 후반에 군사력이 쇠퇴한 투르크는 열강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인을 통역관으로 등용하는데 이를 계기로 그리스인이 점차 외교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발라키아, 몰다비아 등의 통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파나리옷(Fanariot)」이라는 그리스인의 특권계급이 형성되었다.
또한 산악지대에는 결사적으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클레프트의 세력에 대비하여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가 각지에 조직되었으며, 클 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세력이 되었다.

 

그리스의 코린트(Corinth)-유적

 


18~19세기의 러시아-투르크전쟁, 프랑스혁명, 알리파샤 술탄의 반란 등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770년 펠로폰네소스반란의 실패 후, 1821년 남부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이 애국 비밀결사 「필리키 에타레이아(Philiki Etareia)」는 그 지도자 P.A.입셀란테스의 지휘로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펠레폰네소스의 반란이 파트라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지도로 클레프트, 아르마톨이 합세하여 성공을 거두자,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929)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D.입셀란테스의 지휘로 여러 곳에서 투르크군을 공격하였으며, 그리스 선대(船隊)도 이에 참가하여 투르크 함대에 타격을 주었다. 드디어 1822년 1월 그리스 독립이 선언되고, 파나리옷의 마브로코르다토스(1791~1865)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클레프트파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오스섬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스의 코린트(Corinth)-유적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게 되어, 시인 L.바이런을 비롯해서 사재(私財)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다만 영국만이 외상 캐닝을 중심으로 그리스를 교전국(交戰國)으로 인정하고 1823년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투르크는 이집트에게 구원을 청하여, 1824년 정예를 자랑하는 이브라힘파샤군(軍)이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서 점령을 시작한 결과 미솔롱기는 1년간의 항전 끝에 결국 1826년 4월 함락되었고, 뒤이어 아테네도 포위되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프랑스를 동원하여 18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조정하고,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18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宣戰)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에 파병하였다.

 

그리스의 코린트(Corinth)-유적-아폴론 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