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터키 여행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32)

달리는 말(이재남) 2005. 9. 27. 21:21

터키의 카파도키아

 

그리스의 독립은 1829년 아드리아노플화약(和約), 1830년 런던회의에서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前)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18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하였다. 즉 독립 후의 그리스사(史)는 밖으로는 국토확장 책,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 그 2가지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온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스탄불 성 소피아성당

 

독립 당시의 그리스의 영토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아르타만(灣), 볼로스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 위치하는 본토와 키클라데스제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구(舊) 비잔틴 제국의 옛 땅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영토확장운동이 특히 활발히 진행되어 독립 당시 4만 9000㎢이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에 이르렀다.

1854~1956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였고, 1859년의 이탈리아혁명에 자극되어 1861년 그리스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오토매틱 1세가 추방되었고, 덴마크 왕자 게오르그 1세(재위 1863~1913)가 옹립되었다. 영국은 이때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를 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이스탄불(ISTANBUL)-블루 모스크(BLUE MOSQUE)-외관

 

1877~19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 베니젤로스가 총리가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 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정치를 지도하였으며,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과 1913년 2회에 걸친 발칸전쟁 때에는 세르비아?불가리아 등과 함께 투르크와 싸워 더욱 영토를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반(南半), 테살로니케 등을 획득하였고, 에피로스 지방의 남쪽, 크레타섬, 트라케 서부 등지를 영토로 장악하게 되었다.

 

터키의  콘야 제라르딘 레미의 영묘가 안치된 메비라나 박물관(사진작가 서영진 작)

 

그러나 1913년 게오르그 왕이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칸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품고 있었으며, 1914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2세의 사촌인 콘스탄티누스 왕은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는 삼국협상 편에서야 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압력을 가하여 왕을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스는 독일에 선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승국이 된 그리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1919년 5월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스미르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터키의 카파도키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투르크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 그리스주의는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출현하여 『터키』를 재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고, 1922년 그리스 군은 소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1920년 11월의 선거 결과 베니젤로스는 실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대 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 후 터키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터키와의 인구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터키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 명의 터키인이 터키로 귀환하였다. 그밖에 10만 명 가까운 불가리아인 이 그리스를 떠났다. 그 결과 그리스의 인구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아울러 경제문제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스탄불(ISTANBUL)-톱카피 궁전(TOPKAPI PALACE)

이스탄불(ISTANBUL)-톱카피 궁전(TOPKAPI PALACE)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1924년 3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28년 베니젤로스가 다시 총리가 되었고, 1935년 혁명이 일어났으나 곧 진정되었다. 왕정이 부활되고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좌익 공화파가 우세하게 되었으나, 1938년 총리가 된 메타사스는 국회를 정지하고 계엄령을 공포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알바니아 전선에서 그리스 군에게 패전했다.

그러나 1941년 1월 메타사스가 급서(急逝)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으며, 5월에 이르러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형성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지하운동?레지스탕스 등이 조직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이스탄불(ISTANBUL)-보스포러스 해협(BOSPHORUS STRAIT) 크루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