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분쟁 개요
런던데리폭력사태로 시작된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1972년 영국정부의 북아일랜드 의회해산, 대 북아일랜드군대파견 및 직접통치로의 전환 등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내재되어 있던 북아일랜드가톨릭신자들의 불만과 반영감정은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는 유혈폭력사태로 터져 나왔다.
북아일랜드 신교계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 UVF)과 IRA의 무장투쟁은 격렬했으며, 1972년 1년 동안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는 468명에 이른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국은 아일랜드정부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북아일랜드의 주도, 벨파스트시청사
이는 1981년 투옥된 IRA 죄수들이 정치범 처우개선을 위한 단식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10여 명의 죄수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즉, 이 사건으로 IRA는 국제적인 약자 이미지를, 또 영국은 탄압자의 이미지를 갖게 됨에 따라 아일랜드신페인당이 북아일랜드가톨릭신자 내 제1정당으로까지 급부상하게 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측이 협상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협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1990년대는 북아일랜드 내 테러가 정점을 치닫게 되는 시기이자 양측의 평화를 위한 협의도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이 시기 IRA의 테러는 물론 신교도들의 테러도 정점을 치닫게 되는데, 신교도들의 테러로 희생된 사상자가 더 많아짐에 따라 영국정부는 신교도군대인 얼스터 방위연합(Ulster Defense Association; UDA)도 IRA처럼 불법단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93년 12월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여부를 주민들의 뜻에 맡기는 한편 IRA의 무장투쟁포기를 주요내용으로 하는『다우닝가 선언』이 발표되면서 북아일랜드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했고, 1994년 9월에는 IRA가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분쟁해결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1995년 2월 영국-아일랜드 양국정부는『북아일랜드 평화안』을 도출, 분쟁해결의 기본 틀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영국 측의『先 무장해제 後 협상개시』조건과 북아일랜드 내 신교도들의 평화회담에 대한 불신으로 평화협상은 무산되었고, 1996년 2월 IRA는 테러를 재개했다.
이에 영국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 수상은 신페인당에 평화회담 동참을 제의, 1997년 7월 IRA는 다시 휴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평화협상은 같은 해 12월 북아일랜드 유혈사태로 결렬될 위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8년 4월 10일 다자회담을 통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인『굿 프라이 데이 협정(Good Friday Agreement, 聖 금요일협정)』이 최종 타결됨으로써 북아일랜드 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자치정부구성을 통해 평화협정합의안이 수용·이행됨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영국정부로부터 기본자치권을 이양 받았으나, 경찰·사법 분야는 영국정부의 관할로 남겨져 있어 분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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