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대륙 서북쪽의 섬나라, 영국 일주여행

60.북아일랜드 분쟁

달리는 말(이재남) 2023. 1. 6. 07:17

북아일랜드 분쟁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섬 전체의 16%에 해당하는 크기다. 북아일랜드는 현재 영연방의 한 지역에 속하며, 2004년 기준인구는 약 170만 명이다. 아일랜드(에이레)70.273의 면적에 489만 명(2015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하는 섬으로,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주민의 88%가 가톨릭신자로, 이와 같은 종교적배경은 아일랜드분쟁의 핵심요소로 작용해왔다. 현재 아일랜드인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기원전 5세기경 이주한 켈트계로, 기원전 58년 시작된 카이사르의 침공을 통해 로마인의 압박을 받은 이후로 9세기 노르만족, 12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꾸준히 받아왔다.

 

벨파스트 시청-청사 내부의 로비가 대리석으로 마무리되어 조명빛에 비춰진 로비의 분위기가 고상하고 아름답다

대륙의 켈트인들은 로마압제에 굴복하여 상당히 동화되었으나, 섬에 있던 탓에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은 고유의 켈트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1171년 잉글랜드의 헨리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하면서 13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의 3/4가 영국령에 놓이게 되었다. 16세기 초 헨리8세 시기에 영국 내에서 종교개혁이 단행되면서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매우 강화되었다.

 

벨파스트 시청 청사

아일랜드의 가톨릭신자들은 영국의 압제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영국은 아일랜드북부(얼스터 지방)에 개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아일랜드가톨릭신자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북아일랜드신교도주민과 나머지 아일랜드가톨릭신자들 간에는 갈등의 불씨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여전히 아일랜드분쟁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17세기 중반 영국 내 청교도(신교)혁명이 일어나면서 아일랜드 내에서도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했다. 그러나 영국 크롬웰군대가 이를 제압, 1653년까지 아일랜드 전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토지소유가 영국인에게 돌아감은 물론 가톨릭신자들의 선거권·피선거권 박탈, 공직진출 배제, 재산소유제한 등 영국의 아일랜드탄압은 상당히 극심해졌다.

 

북아일랜드의 주도, 벨파스트성

 

그리고 1801년 아일랜드는 결국 영국에 합병되어 1921년까지 영국령으로 유지되었다. 19세기 영국의 탄압적 통치에 대한 아일랜드의 저항으로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제약의 일부는 완화되었지만, 아일랜드 내 독립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고,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반영(反英)민족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반영운동의 핵심은 아일랜드국민당(Irish Nationalist Party; INP)과 신페인(Sinn Fein: Ourselves Only), 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 Army; IRA)으로서 특히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영국의 분쟁은 최근까지도 심각한 문제가 되어왔다.

 

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즈대학교(Queens university)는 건물도 너무 예쁘고 분위기도 너무 좋았다. 아무튼 정말 예뻤던 퀸즈 대학교다.

 

1919년 신페인당은 아일랜드수도인 더블린에서 제1회 아일랜드국민의회를 개최하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이는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아일랜드무장투쟁조직 IRA와 영국군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으며, 드디어 1922년 아일랜드국민의회와 영국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부 얼스터지방 6주는 영연방령으로 하되, 나머지 26개 주는 영국자치령으로 하는 아일랜드자유국이 성립하였으나, 조약의 내용을 두고 아일랜드 내부에는 완전한 독립파 vs. 현실 타협파 간의 충돌이 계속 빚어지게 되었다.

 

아일랜드 코크의 가슴 아픈 사랑, 타이타닉의 마지막 출항지 마일코브는 오래된 나무로만 보이지만 이곳을 통해서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타이타닉에 탑승했단다. 타이타닉 카페도 있다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분열로 신페인당과 IRA의 조직은 분할되었으며, 심지어 IRA는 잠시 와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아일랜드자유국정부는 헌법제정을 통해에이레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이어 1949년에는 국가이름을아일랜드로 개칭, 영연방을 탈퇴함으로써 현재의 아일랜드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음에도 아일랜드 내에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교도지역 북아일랜드와 나머지 가톨릭신자들의 아일랜드의 마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들의 대립은 영국 vs. 아일랜드이자 신교도 vs. 가톨릭신자, 연방주의자 vs. 민족주의자의 갈등이기도 했다.

특히 오랫동안 신교 측 연방주의자들에 의한 가톨릭신자 측 민족주의자 차별·억압이 갈등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연방주의 정당(Ulster Unionist Party; UUP)은 유일한 집권당으로서 총리배출을 독점했으며, 그 외에도 정부구성은 늘 신교 연방주의자들이 차지해왔던 것이다.

이에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인권운동단체 북아일랜드시민권리 연합체(Northen Ireland Civil Rights Association; NICRA)가 결성되었고, 1968년에는 학생단체(People's Democracy; PD)가 결성되어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국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성벽이 포함 문화유산 건축 문화유산 요소

 인권운동초기의 북아일랜드 테렌스 오닐(Terence O'Neill) 총리는 북아일랜드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강경한 신교도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가톨릭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어 1968105일 런던-데리(London-Derry)에서의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졌으며, 이 사태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