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휴가

56.독도와 울릉도를 지켜온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는『안용복 기념관』

달리는 말(이재남) 2021. 1. 27. 15:04

독도와 울릉도를 지켜온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는안용복 기념관  

필자일행의 승용차는 울릉순환로로 나와선창선착장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석포길을 따라안용복 기념관을 향하여 달린다.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는 곳에 출입을 막아놓은 샛길이 하나 보인다. 지금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해안마을, 와달리로 향하는 길이다바깥에서 봐도 깊어 보인다. 길이 험해 눈이나 비가 많이 올 때 위험하다고 했다. 계획대로 석포로 향한다. 낙엽으로 부드럽게 다져진 길 위로 달려가니 울릉읍과 북면의 경계다. 이제야 내수전과 석포주민들이 오가던 길임이 실감난다. 북면 땅으로 들어서자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륙교로 연결된 관음도와 섬목도 보이고 울릉도숲길 종합안내도에서 현재위치를 확인해보니, 바로 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석포마을 안내판을 따라 가다보니 두 갈림길과 맞닿는다오른쪽으로 난섬목가는 옛길로 올라선다. 한참을 이어진 포장도로를 따라안용복 기념관으로 향한다. 울릉읍과 북면을 가르는 경계선표지판을 지나 내수전 옛길 끝에 도착하면 시원한 하늘이 여행자를 반긴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듯 보이는 임도다. 이곳에서 약 1km 거리에 독도전망대와 안용복기념관이 있다.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안용복기념관 앞을 흔히들석포전망대라고 부른다. 석포일출전망대인 러시아전쟁유적지와는 엄연히 다른 곳이다. 울릉읍과 북면을 가르는 경계선표지판을 지나 내수전 옛길 끝에 도착하니 안용복 기념관이 있다. 안용복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안용복은 부산 왜관(일본 관청)인근에 거주하던 사노비의 신분으로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말을 많이 익힌 것 같다. 조선 초기당시 울릉도와 독도는 분쟁을 막기 위하여 空島(빈섬)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는데, 안용복은 숙종19(1693) , 박어둔을 비롯한 40여 명의 어부들과 함께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이곳에는 이미 일본 돗토리 현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두 나라 사람들은 조업 권을 놓고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수적인 열세로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은 일본의 오타니 가문 어부들에 의해 오키도로 납치되어 갔다. 안용복은 그곳에서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의 땅임을 들어 구금 납치의 부당성을 도주에게 따졌다안용복의 항의를 받게 된 도주는 상관인 돗토리 현 태수에게 이들을 이송시켰다. 사건을 보고받은 태수는 당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 관백에게 안용복 등을 보냈다.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를 써주었다.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자산도, 즉 우산도(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한 안용복이나 일본 땅이 아니라고 한 막부의 서계는 독도영유권주장에 대한 중요한 국제적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대마도주의 생각은 달랐다. 황금어장인 울릉도와 독도의 편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대마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막부의 서계를 빼앗는가 하면, 50일을 더 억류시켰다부산포의 왜관으로 이송한 뒤에도 40일이나 더 구금한 뒤에야 동래부로 넘겼다. 동래부에서 안용복은 서계강탈사건에 대해 소상하게 보고했지만, 동래부사는 도리어 그를월경죄인으로 몰아 감금해 버렸다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대마 도주는 다치바나 마사시게를 사신으로 파견, 울릉도가 일본의죽도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어민들의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까지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에 대한 수토정책이 확립되고, 독도에 관한 사항이 중앙정부에 보고되었다는 점에서 안용복의 활동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선으로 돌아 온 영웅 안용복은 훈장 대신에 월경을 했다는 죄로 곤장 백대를 맞고 쫓겨나게 되었다.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