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이 잠들어 있는 바딘광장과 그의 일대기
-하노이 바딘광장의 국회의사당 건물-
외국의 귀빈을 맞는 자리에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나가라고 주변에서 권했을 때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가 던진 말을 베트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옷 자랑을 하기 위해 그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입고 있는 옷보다 못한가?"
호치민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대신 단 하나, 베트남 국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니, 그는 죽으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을 베트남 국민에게 남기고 떠났다. 가난하긴 하지만 자부심이 있는 나라, 베트남에 가면 다른 곳은 몰라도 바딘 광장에는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딘광장의 호치민묘
베트남 남북통일에 일생을 바친 영웅 호치민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 9월2일 건국기념일에 맞춰 조성 되었다. 이곳에 그가 1945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바딘 광장이 있어 건국기념일이면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매년 10월~11월경에는 보수공사로 1달 이상 휴관을 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우리일행이 이 광장을 방문한 날자가 10월20일이라서 아쉽게도 호치민의 묘소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묘소는 베트남 국회의사당과 공산당본부 건물의 건너편 광대한 바딘광장 위에 위치해 있다.
다낭으로부터 운반해온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안에 레닌이나 스탈린처럼 호치민의 유해가 유리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묘소에 들어갈 때는 외국인들조차 묘소 200m 전방에서 차를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하며 묘역 내에서는 절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하며, 슬리퍼, 반바지 차림으로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카메라나 가방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으므로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두 줄로 줄을 맞추어서 입구로 들어서면 엄숙한 근위병과 절제된 실내 분위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묘소 안에서는 경건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호치민의 시신은 검소한 갈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포갠 채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누워 있다. 묘소 관람시간은 오전에만 관람할 수 있단다.
베트남-하노이-바딘광장과 호치민 영묘
우리일행이 바딘광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그 광장을 메워갔고,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묘소는 베트남 국회의사당과 공산당본부 건물의 건너편 광대한 바딘광장 위에 위치해 있다. 다낭으로부터 운반해온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안에 레닌이나 스탈린처럼 호치민의 유해가 유리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묘소에 들어갈 때는 외국인들조차 묘소 200m 전방에서 차를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하며 묘역 내에서는 절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하며, 슬리퍼, 반바지 차림으로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카메라나 가방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으므로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두 줄로 줄을 맞추어서 입구로 들어서면 엄숙한 근위병과 절제된 실내 분위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묘소 안에서는 경건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호치민의 시신은 검소한 갈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포갠 채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누워 있다. 묘소 관람시간은 오전에만 관람할 수 있단다.
베트남-하노이-바딘광장과 호치민 영묘
베트남-하노이-바딘광장과 호치민 영묘
우리일행이 바딘광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그 광장을 메워갔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그 광장을 메우는데 일조를 했다. 그 광장에서 되돌아 나온 일행은 곧 차를 타고 공자를 모신 문묘를 방문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둘러보는 동안 베트남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쉽게 짐작하게 만든다. 유교적 전통과 한자를 사용하던 그들의 문화는 우리네의 유교적인 전통과 닮아있고 꾸억뜨쟘(Quoc Tu Giam)이라고 발음되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면서 국립대학 역할을 하던 곳은 우리나라의 국자감을 연상케 한다.
베트남-하노이-문묘(文廟)
베트남-하노이-문묘(文廟)
거북이 등에 세워진 비석(82개)에 새겨진 과거 급제자들의 이름이 연도 별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라든지, 사당 중앙에 모셔진 공자의 모습이나 건축적인 양식에서 중국적인 전통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물론 그 모든 것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문묘는 하노이에 남아있는 사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1070년 라탄똥 황제가 공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리(Ly) 왕조 동안 불교에서 유교로 국교가 전환되면서 문묘는 당시의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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