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 빅토리아 여왕 이래 영국왕실의 주거지가 된 버킹엄궁전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이래 영국왕실의 주거지가 된 버킹엄궁전은 원래 버킹엄공작의 집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왕실에서 이 집을 매입, 증?개축을 통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여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정면 중앙에 왕실깃발인 로열 스탠더드가 나부낀다. 1993년 8월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된 이래 매년 2개월만 공개된다.
그리고 평일에는 11: 30에 위병교대 식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항상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어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1시간 전에는 이곳에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들어갔을 때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부터 버킹엄궁전으로 행진하는 위병들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이곳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런던의 버킹검 궁전
런던-웨스트민스터 궁전
그러나 궁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위병교대 식은 볼 수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 틈에서 구경하면서 사진촬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는 담에 기어 올라가, 그 위에서 궁전을 구경하면서 사진촬영을 하는 데에는 별무리가 없다. 또한 영국에 주재하는 영사나 대사들이 영국여왕의 신임장을 받으려면 전통예식에 따라 마차를 타고 궁전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절차가 있다. 이 멋있어 보이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간략한 영국의 역사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다.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
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 공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런던-런던 아이의 모습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과 시민을 추밀원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가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1559년에는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 신앙개조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 공히 확립하였다.
런던-세인트 폴 대성당
신왕 제임스 2세는 가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메리여왕과 윌리엄 3 세로 만들었다.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을 벌였다.
런던-엘리자베스 타워(Elizabeth Tower)와 주변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 아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윈저성-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로어 워드(Lower Ward), 미들 워드(Middle Ward) 및 원형 탑(Round Tower), 어퍼 워드(Upper Ward)이며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롱 워크(Long Walk)이다. 사진상 윗쪽 좌측에 템즈 강(Thames River)이 보인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마저 저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전
'서유럽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웨스트민스터 대 사원과 국회의사당 (0) | 2012.11.17 |
---|---|
5.세계3대 박물관, 대영 박물관 (0) | 2012.11.17 |
3.그리니치천문대, 타워브리지 (0) | 2012.11.16 |
2.Amsterdam의 스키플공항을 출발하여 도착한 런던의 히드로공항 (0) | 2012.11.16 |
1.꿈꾸어오던 유럽을 향한 출발 (0) | 201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