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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7)-심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달리는 말(이재남) 2008. 10. 16. 08:58

 심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비록 점심식사로는 조금 이른 시간, 11시경이었는데 이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를 맛있게 했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도 좋았다.  북한동포가 운영하는 음식점의 특징은 식사가 끝날 즈음하여 노래를 부르고 간단한 공연을 베풀곤 한다.  이날에도 이곳 음식점에서는 노래와 간단한 공연이 뒤따랐다.  

이른 시간에 점심식사를 해야만 하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전용버스로 무려 6시간을 달려 심양에 도착하면 오후 6시 30분에 출발하는 북경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타야한다. 더군다나 심양으로 통하는 길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시간여유를 갖고 출발하려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여 집안의 유적지를 다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집안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적을 전시하고 있는 시립박물관의 고구려유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면 반드시 둘러봐야 할 곳이 집안박물관이다. 주요 전시물은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본과 고구려의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농기구 출토 물, 광개토왕릉비 탁본 등이 있다. 비록 모조품이지만 개방하지 않는 고분벽화 모사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원래는 아주 작은 박물관이었는데,  2004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재단장하면서 입장요금도 매우 많이 올랐다.  

박물관 입구에 걸려 있는 고구려소개는 한국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에 자리한 소수 정권의 영토였다는 내용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국력의 중요함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천추총은 고구려 15대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장군총과 비슷한 형태의 정방형 계단식 적석 묘로 집안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무너져 덩그러니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고분 연구가가 아닌 한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이유는 없단다. 단지 지나가는 길에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유리왕에 의해 천도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 터이다. 1900년대 초만 해도 6개의 옹성문과 해자로 이루어진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1921년 중국정부가 전체적으로 성을 개수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유적까지 깡그리 없애버리는 참극을 저질렀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만 7m에 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성터 일대에 집이 들어서며 모두 무너져 북쪽 벽 4~5단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를 태우고 며칠 동안 전용버스를 안전하게 운전해주고 있는 운전기사, 산따거는 심양사람이다. 달려가는 곳곳에 차가 막히고 심지어 軍당국에서는 20분 동안 길을 막아놓고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까지 저질렀다. 그러나 계속 달려 신빈만주자치령이라는 곳을 옆으로 지나가며 누루하치가 태어나서 살았던 마을이며, 청영능이라는 곳에서는 누루하치의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만주족을 통일하고 나아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淸나라 太祖, 누루하치는 본래 명나라 군의 장수로서 그의 임무는 동족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1583년 여진족장 아타이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누루하치를 포함한 明나라군이 아타이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마지막 총공세를 앞둔 그때에 明의 총사령관 이성량에게 두 명의 여진족사람이 찾아왔었다.
전쟁 중인 총사령관을 직접 찾아올 정도의 여진족이었다면 이 사람들 역시 明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특수층이었을 것이다. 이 두 명의 여진족사람은 다름 아닌 아타이의 장인이었고 또 한 사람의 늙은 노인은 이 장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라 했다. 반란군족장 아타이가 바로 자신의 사위임을 밝히고 자신이 직접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성안으로 들어가 아타이를 설득해서 투항하도록 노력할 터이니 공격을 중지해달라고 요구했다. 明의 사령관 이성량은 서로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다며 그렇게 해 보라면서 단 하루의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약속했던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도 성안으로부터 아무런 기별이 없자 이성량은 총공격을 명령했고 격렬한 전투가 있은 다음 예상대로 성은 쉽게 함락되고 성안의 여진족은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 여진족의 시체더미 속에서 明의 장수 한명이 여진족의 시체들을 끌어안고 목 놓아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전날 아타이를 투항하도록 설득해보겠노라며 성안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사람들의 시체였고 통곡하는 明의 장수는 그 사람들의 아들이자 손자인 누루하치였었다. 
즉 누루하치와 적장 아타이는 처남 매부 間이었던 것이다. 치열한 전투 중에 성안에서 여진족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마구 죽이다보니 일어난 사고였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이성량은 누루하치를 불러 본의 아니게 일어난 실수였다며 위로연을 베풀고 군마 30필과 상당량의 재물을 주며 누루하치의 마음을 달래려했지만 효심이 깊었던 누루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죽인 명나라를 위해 더 이상 충성할 수 없다며 이성량이 준 위로품을 받아 챙기고선 明을 떠나 동족이 있는 만주로 향했다. 
여진족을 죽이는 게 주된 임무였던 누루하치가 명군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원한을 품는 건 완벽한 모순이자 자가당착이지만 어찌됐건 누루하치는 그렇게 돼서 명과 결별하고서 절치부심의 복수심으로 힘을 기른 다음, 후일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淸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중국역사에서 누루하치의 명나라 장수경력을 들추어 그를 평가하는 중국인은 없고 지금도 만주족에겐 누루하치는 영원한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 장춘의 문화광장의 모녀상

장춘의 문화광장

장춘의 세게조각공원

백두산입구

백두산 조중경계비 5호

백두산천지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주변


백두산천지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