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금강대협곡,북경,용경협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9)-북경의 상징이자 곧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광장

달리는 말(이재남) 2008. 10. 23. 08:51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북경의 상징이자 곧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광장


여행을 시작한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도 역시 6시 반에 모닝콜이 있었지만 2층의 레스토랑으로 아침식사를 하려고 내려갔는데 식사를 하려는 여행객들이 차례를 기다리느라 길게 줄을 서있다. 호텔은 엄청나게 크지만 그 크기에 비례하여 레스토랑을 꾸미지 못한듯하다.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7시 30분에 전용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이틀 밤을 이곳에서 더 묵어야 한다니까 짐은 호텔에 남겨놓고 나왔다. 북경의 출퇴근시간은 물론 보통 때에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교통지옥을 방불케 하는 이곳이다. 우리가 이른 시간에 호텔을 출발하였으나 길거리의 차량들은 마치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은 것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전용버스를 타고 주차장처럼 느껴지는 길을 벗어나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천안문광장이다. 역사박물관 저편으로 천안문 광장이 보인다.

우리를 3박 4일 동안 안내할 가이드 김춘산씨는 두만강 근처의 하얼빈에서 태어나서 자란 우리 동포의 3세다. 그곳 하얼빈에는 조선인학교가 없어서 김춘산씨, 그는 한국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 내에서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게 되니까 그도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안양에서 거의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받았다고 했다.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므로 중국의 56개 소수민족가운데 약 120만 명의 조선족들은 국가당국의 인정을 받고 우대를 받으며 살고 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중국에 돌아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좋은 집을 짓거나 아파트를 사서 잘 살고 있으므로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국, 한국의 덕택이라고 고마움을 표하는 김춘산씨의 설명이 대견스럽게 느껴온다.

그는 3박 4일 동안 안전하게 우리일행을 모실 운전기사 석따거를 소개하면서 큰 박수를 부탁했다. 전용버스를 타고 주차장 같은 길을 벗어나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천안문광장이다. 역사박물관 저편으로 천안문 광장이 보인다. 지하도로를 따라 천안문광장으로 향했는데 광장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또한 중국 사람들의 엄청난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일정 중에서 이렇게 중국인들을 많이 보고 만나긴 처음이다.  수많은 경찰들이 여기저기 눈에 많이 뜨이는 것으로 보아 경비가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신 중국성립 이후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 되었다. 문 앞에는 도랑이 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5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조각이 아름답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여러 개의 인상 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예로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행사 등이 이어졌다.

천안문광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호유방)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광장으로 점차 운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등소평)은 이들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결국은 같은 해 6월 4일 천안문광장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난사와 전차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천안문은 원래 궁궐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15년(1417년)에 지어졌으며, 승천문이라 하였다. 승천은 하늘의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천안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후 몇 번이나 불에 타 1651년 청나라 때 재건되었으며 이때부터 천안문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히 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화표를 대부분 다리, 궁전, 성벽 앞에 세워 장식과 표징으로 삼았다. 천안문 앞뒤의 화표는 옹근 한백옥석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꼭대기에 석수가 웅크리고 있고, 기둥에는 빙 둘러가며 구름송이를 조각하고 그사이에 큰 용이 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뒤에 두 쌍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그 무늬는 생동적인 화표중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북경시 중심가에 위치하는 천안문광장은 해방 후 대규모의 확장공사를 통해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m터로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광장이 되었다. 광장 정북의 천안문은 원래 명, 청 황성의 정문이며, 황제가 반포하고 조서를 내리던 곳이다.
천안문광장은 자금성의 외성문인 천안문의 앞이 있다하여 붙어진 이름이며 광장주위에 천안문, 인민대회당, 역사박물관, 모택동기념관 등 주요한 건물로 둘러 싸여있다. 근대의 1919년의 5.3운동 때부터 1989년의 천안문사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국문화운동의 발생지로서 지금은 중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혀졌다.
매년 동지에 황제가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에 지단에 가서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추에 선농단에 가서 몸소 밭갈이하며, 황제의 대혼, 출정 등 중요행사시에 출입하던 문이다. 때문에 천안문의 건축규제는 매우 높아 성문이 5개, 중루의 둥근 기둥이 9개있다. 공화국창건 후 천안문 앞 좌우에 관람대를 증설하고 그 앞에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매년 봄과 가을이면, 이곳은 갖가지 꽃들로 오색찬란하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매우 북적거린다. 관람대 앞은 금수하로서 그 위에 5개의 한백옥석 다리가 가로 놓여 있으며, 다리 난간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도안과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천안문 성루 앞이 바로 천안문 광장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본래 북경에는 내성, 외성 등이 있었는데 청나라 때 내성에는 지배 계층인 만주족, 외성에는 피지배 계층인 한족이 살았다. 황제는 황성 안의 자금성에 살았는데 지금은 내성, 외성은 흔적만 남아 있고 황성은 천안문만 남아 있는 것이다. 천안문에는 아치모양의 다섯 개 통로가 있고 중앙에 거대한 모택동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천안문광장에는 대단히 많은 인파로 붐비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데에도 다른 관광객들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구경이 더욱 흥미로울 정도다. 광장에서 한 참을 보낸 일행은 큰 도로를 건너서 자금성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