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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11)-서태후와 얽힌 사연이 많은 이화원

달리는 말(이재남) 2008. 11. 1. 07:03

 

       북경 자금성의 전경

 북경의 이화원                                                                                                                  

북경의 이화원                                                                                                                  

북경의 이화원                                                                                                                             

북경의 이화원                                                                                                                   

서태후가 즐겨 타던 돌로 만들어진 배                                 

          곤명호수 주변경치 

 

                                                  

서태후와 얽힌 사연이 많은 이화원

 

천안문에서부터 자금성을 구경하면서 긴 시간동안 걸었으므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전용버스를 타고 「태가촌」이라는 레스토랑으로 옮겨갔는데 그 태가촌이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태국 민족출신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그렇게 부른다. 안에 들어가니 꽤나 넓은 홀 안에는 여기저기 테이블들이 놓여있고 한쪽에는 무대가 준비되어있다.

「태가촌」안에 들어서자말자 물 같은 것을 뿌려 주는데 이것은 악귀와 같은 안 좋은 것을 쫓아내는 액때움을 하는 행위란다. 그리고 빨간 털실을 팔에 묶어 주었는데 이것 또한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의 행운과 안녕을 비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하였다.

다소 이른 시간이긴 하였으나 고대하던 식사가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 술안주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태국식 음식이긴 하였으나 먹는데 조금도 거북하지 않았으며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식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이 곳에서 실시하는 행사를 관람했는데 다양한 춤과 음악이 있었다.

끝에 가서는 함께 나와서 춤을 추자고 우리 일행이 있는 곳에 사회자가 왔는데 우리는 시간에 쫓겨 그곳을 바삐 빠져나오고 말았다. 우리들도 참여 했더라면 더 즐거운 문화체험이 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화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약간 덥게 느껴지기는 하였으나 건조한 날씨 탓에 나무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했다. 한자표기로는 이화원(

和園)이며 중국 북경시의 서쪽 교외에 있는 공원으로서 총면적 2.9㎢이다.

1153년 완안량(完顔亮)이 행궁(行宮)을 설치한 것이 시초로서, 원(元)나라 때 지금의 완서우산(萬壽山)과 쿤밍호(昆明湖-곤명호)를, 명(明)나라 때 호산원(好山園)을 조성하였다. 청나라 때인 1764년에 개축, 청의원이라 부르다가 1888년 서태후(西太后)가 다시 개수하고 이화원(이허위안)이라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이화원은 전각과 나무뿐만이 아니라 바위까지 온통 서태후와 얽힌 내용뿐이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동북부의 궁전구역에는 仁壽殿(인수전), ·러서우탕(樂壽堂) 등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있으며, 궁전구역 서쪽 풍치구역에는 전통적인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창랑(長廊)회랑, 곤명호를 가로지르는 스치쿵차오(십칠공교)다리 등이 옛날 그대로 보전되어있었다.
이 밖에도 고전적인 조경 풍치림의 특성을 풍부하게 살린 화려한 건물정원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중국 조경풍치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 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활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유람하던 곳이다. 이화원의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각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전함으로써 상부상조의 전체적인 원림 예술효과를 나타내었다. 이화원 정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 「이화원」세 글자는 광서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란다.

낙수당은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리고 처마 밑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서유기와 같은 중국고대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그림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 그림들은 빛바랜 흔적들이 보였지만 이화원을 통틀어 같은 그림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안에 들어가 내용설명을 듣기위하여 김춘산씨를 쫓아가고 있는 중인데 아내의 여고동창  친구 5명을 만났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다. 그 5명은 매월 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아내의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반가워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괴성을 지르고 부둥켜안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참을 친구들과 뜻밖의 만남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아내일행의 모습을 켐코더로 담아두려고 애를 썼다. 그 친구들은 북경관광을 마치면 곧 장가계로 옮겨간다고 했다.

우리일행은 이화원에서 나와 곤명호선착장으로 옮겨가 탑승한 유람선이 출발하자 뒤로 보이는 이화원 북쪽 만수산의 아름다운 불향각의 풍광이 시야에 들어와 열심히 켐코더에 담았다. 그 옛날 순전히 인력으로 이런 큰 호수를 만든다는 것은 중국이 아니고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규모다.
이렇게 큰 호수를 만들면서 파놓은 그 흙으로는 산을 만들어 만수산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경관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 것을 생각하니 애틋한 감정이 솟아난다.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배는 돌로 만든 배란다. 정교하게 타일을 부치고 조각하여 만들었지만 그 배는 물에 띄울 수 없는 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