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금강대협곡,북경,용경협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12)-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달리는 말(이재남) 2008. 11. 6. 16:57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북경 곤명호수의 주변경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유람선을 타고 뒤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얽힌 사연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갑작스럽게 달라이 라마에 대한 역사를 꺼내야 할 것 같다. 굴곡 많은 역사로 이어온 티베트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원숭이에게서 찾는다. 알룽 계곡에서 살던 원숭이가 땅위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꼬리가 떨어지고 인간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현재의 진화론과 흡사하다.

티베트 최초의 왕조는 라싸에서 남동쪽으로 183km 떨어진 오늘날 티베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지방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제당(체탕)에서 처음 발생했다. 7세기 초엽 송첸 감포대에 이르러 티베트전역을 통일한 중국 쪽 사서에 토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티베트는 라싸로 천도하면서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당대의 대제국인 당나라의 수도 서안을 공격할 정도로 번성했다.

 

티베트의 분주한 라싸시가지

티베트의 멀리서 바라본 포탈라궁                                                         

 

갑자기 커진 왕조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때마침 들어온 불교는 왕실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며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흥종교가 갑자기 번창해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구세력과의 힘겨루기 끝에 왕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9세기에 티베트는 여러 개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봉건왕정을 대체한 것은 불교였으며 이후 티베트는 사원에 거점을 둔 불교종단에 의해 통치되는 특이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유력한 몇 개의 사원이 하나의 작은 소왕국과 같은 힘을 발휘했으며 정치적 주도권을 쥐려는 사원 간 싸움이 쉼 없이 계속되었다. 때로는 몽골이나 중국 등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투쟁을 벌리기도 했지만 17세기 게룩파가 몽골의 군사력으로 닝마파를 무찌른 사건이 생겼다. 이후 게룩파의 지도자가 몽골로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하사받았고 달라이 라마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티베트는 몽골의 지배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나 만주족국가인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급속도로 청나라에 가까워지게 되고 청나라 황실은 달라이 라마를 국사(國師)로 임명하고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로 티베트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협조적인 관계가 200년간 이어졌다.

그 시절, 청나라는 북경의 여러 곳에 그들을 달래기 위한 절을 지어주었으며, 우리일행이 곤명호에서 유람선을 탔을 때 뒤로 아름답게 보이는 건축물들이 그 절들이란다. 그러나 티베트와 청나라 사이의 긴밀한 협조는 1911년 청나라의 멸망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고 급격히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는데 이때쯤 중국은 국내문제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티베트의 독자적인 행보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티베트의 수장이었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근대적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1949년 모택동은 티베트를 점령하고 달라이 라마 14세를 회유하는 정책 덕택으로 달라이 라마를 중국의 주요직에 임명하였지만 불안한 동거는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티베트를 공산주의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중국과 종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의 관계는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9년 티베트사람들은 봉기했으며 그 틈을 탄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고 그 당시 중국과 최악의 관계였던 인도는 달라이 라마를 환영하고 매그로드 간즈라는 곳에 망명정부의 땅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달라이 라마 망명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사회주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말하는 「봉건적인 잔재」와의 싸움을 벌였고 그 와중에서 약 120만 명이나 되는 티베트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라싸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조차 중국의 지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고 이곳에 관광 온 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현실을 알리고자 애를 쓴다는 것은 중국의 발표와는 달리 티베트가 순응적이지 않다는 가장 큰 증거라 할 수 있다.

최근의 국제적인 상황은 티베트인들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제는 UN이나 미국조차 중국을 마음대로 몰아세우지 못하는 상황이다. 달라이 라마는 10년 전만해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해왔지만, 요즘은 중국의 압력 때문에 달라이 라마가 방문할 수 있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2005년 3월 달라이 라마는 기존의 티베트 독립입장에서 한발 후퇴한 중국이 티베트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해준다면 중국의 울타리에 있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지만 아직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북경은 지금

 

북경은 중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전국시대(B.C403~221)다. 그 당시만 해도 별 볼일 없던 작은 연나라의 수도로 중국에서 그 존재가 미미했었다고 한다. 북경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7세기 경항대운하의 개통을 계기로 경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부터다.

북경의 급속한 성장은 급기야 원나라 시절, 통일 제국의 수도로 지정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광의 초석을 닦기에 이른다. 특히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던 19세기까지 북경은 명실공이 아시아의 수도, 세계문명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중국은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급속히 몰락했으며 중국의 패배는 북경이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북경이 다시는 과거의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재기는 빨리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10여년 사이의 눈부신 발전은 북경이 다시 세계 속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하고 있다.  현재의 모든 북경 사람들은 애타게 2008년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도쿄와 서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3번째의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지만 이들은 잃어버린 200년의 세월을 이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세계가 북경을 주시하고 있다.  용은 다시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일행이 곤명호수를 건너 유람선관광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뽕나무 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  고치로부터 명주실을 뽑아 실크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옷과 옷감을 파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우리부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므로 건성으로 듣는척하다가 그곳을 서성거렸다.

그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중국차(茶)문화에 관한 홍보센터에 들어가 중국차를 소개하고 시음하는 차박사가(茶博士家)이다. 여러 종류의 차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때마다 주는 차를 마셔댔다. 살 사람은 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관심 없이 그곳을 나왔다.

실크나 중국차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행들은 김춘산씨에게 짝퉁상품을 파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진지하게 부탁을 했다. 가이드 그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을 만나게 되면 거의 똑같은 부탁을 받아왔단다. 이번에도 그는 하는 수 없이 그곳을 안내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겠다고 실토하면서 그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가방, 지갑, 배낭, 갖가지 옷들과 신발 그리고 심지어는 전자제품까지 거의 없는 상품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을 갖춘 짝퉁시장이었다. 짝퉁 왕국 중국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명품부터 국내에서 인기 있는 생활용품, 식품, 컴퓨터, 자동차, 전자제품, 프랜차이즈 업체 등 수 만 가지의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의 짝퉁문화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기인한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그 시초는 서법(書法)으로 유명한 왕희지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왕희지의 제자들은 스승의 필체를 흉내 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중국의 짝퉁 문화 실로 대단할 지어다!

1시간 40분후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시간약속을 했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조차 부족하여 거의 2시간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약속장소에 모두 모였다. 일행은 거의 모두 몇 가지씩의 상품을 사가지고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구입한 상품을 열심히 자랑하면서 다음 장소로 옮겨갔다. 

다음 장소란 사천기예단의 서커스공연을 관람하려고 옮겨간 극장이다. 1시간 정도로 공연되는 서커스는 손에 땀이 나도록 아슬아슬한 묘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묘기들은 위험한 경우가 많았는데 사천기예단원들은 고아원출신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묘기는 원래 켐코더에 녹화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으나 그냥 구경만 하기에는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묘기 하나 하나를 숨죽여가면서 몰래 촬영했다.

사천기예단의 서커스의 묘기를 구경하고 북경요리를 대표한다는 북경오리 요리를 먹으려고 꽤나 규모가 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북경에 오면 꼭 먹어보라는 베이징 덕 즉 북경오리를 먹어봤다. 훈제를 해서 그런지 오리의 특유의 비린내는 나지 않았고 밀전병과 같은 쌈에 오이와 춘장과 같은 소스에 찍어먹었는데 맛있어서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치웠다. 중국음식 중에서 북경시민들이 즐겨먹는 요리이자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구이를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벌써 10시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