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금강대협곡,북경,용경협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6)-우리역사의 자존심, 광개토대왕의 비

달리는 말(이재남) 2008. 10. 6. 22:49

  

고구려 장수왕능

고구려 장수왕능

고구려 장수왕능 입구

고구려 장수왕능비

고구려 장수왕능 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우리역사의 자존심, 광개토대왕의 비


 

장군총에서 광개토대왕비가 서있는 곳으로 15분 정도를 걸어, 비가 서있는 곳 내부에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광개토대왕비는 414년 고구려의 20대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6.4m, 무게 37톤의 거대한 기념비이다. 우리역사의 자존심, 광개토대왕비의 면에는 총 1802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150자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들의 족보, 그리고 광개토대왕에 대한 간단한 행적 소개, 2장은 광개토대왕이 수행한 정복활동의 내용이며 3장은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수묘제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수묘인의 출신지를 밝혀 놓았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375년~413년)은 고구려의 19대 왕으로서 22년간 재위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태자이다. 호태왕(好太王), 영락태왕(英樂太王)이라고도 불렸으며, 휘(諱)는 담덕(談德)이다. 묘호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외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이례적인 영토 확장을 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대왕이 사용한「영락(永樂)」이라는 연호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으며,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즉위즉시 대방탈환을 시작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석현 등 10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392) 9월에는 북으로 비려를 점령하였으며 다시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백제 58성을 점령,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고, 400년에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신라에서 왜구를 격퇴함에 이어 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서쪽으로는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지역을 확보하였고, 407년 고구려 출신 연나라인 고운(高雲)이 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여 고구려와 상하 관계를 맺음으로서 서쪽 지역의 안정을 찾았다. 410년에 지배권 내에 있던 동부여를 재차 공략하여 64개성 1400개 촌을 완전 병합하였으며 같은 해 동예(東濊) 역시 완전 병합하였다.  

413년 39살의 나이로 의문사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장수왕이 확장 영토를 기반으로 백제를 완전 점령하고 유연과 함께 현재 내몽골 지방의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였으며, 내치를 다져 나라 안으로도 안정을 꾀하게 되어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초기 장군총으로 비정되었으나, 현재는 광개토대왕비와 더 가까이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로 삼면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야 제대로 관람할 수 있다.  유리 속에 있는 비문을 어떤 이유인지 군데군데 회칠이 되어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한일 간 역사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른바 신묘년조 논쟁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문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 부분을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한국 사학계의 반론은 辛유년래와 도해파를 끊어 읽고서 그 사이에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설로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왜가 아닌 고구려라고 보는 주장과 19세기에 일본이 광개토왕비의 비문을 조작했다는 설로 나뉘어 있다.  

싸움구경에 정신이 없던 중국은 현실적으로 고구려와 관계있는 한국보다는 일본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최근 들어 일본 쪽 입장으로 기울고 있다. 고구려가 중국사로 넘어가고, 한반도 남단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중국과 일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한민족 정통성의 성립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한반도가 한민족과 상관없는 땅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이 비문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간헐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나 대체로 위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남부지역에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라 정리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 비문은 고구려의 최대영역이 만주지역은 물론 북으로 몽골지역, 서로 거란족의 근거지인 염수 지역과 북경에 까지, 남으로 한강까지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와 비를 배경삼아 몇 카트의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걸어서 광개토대왕 능을 찾아갔다. 장수왕 능에 비해 초라해 보일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광개토대왕 능에서 걸어 나와, 전용버스를 타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묘향산」이라는 북한동포가 경영하는 식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