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 9

84.프로방스

우리나라의 여름하면 떠오르는 것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뙤약볕, 즉 강렬한 용광로 같다면, 프로방스에서의 여름은 약간 선선한 그러면서도 느긋함이 느껴지는 작은 시냇가 같은 느낌이랄까?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환상이랄까? 누구에게나 꿈에 그리는 멋진 성과 드넓은 평원을 한번쯤 상상해보는 프로방스의 여름을 그려보는 그런 곳이다. 현재의 부슈 뒤 론·바르·바스잘프·보클뤼즈·알프 마리팀 등의 5현에 해당하며, 주도는 에크스 앙 프로방스이다. 콩타브네상을 포함하는 론강 좌안과 하구의 카마르그 지방을 제외하고는 산이 많다. 동부 이탈리아국경에는 해안알프스가 솟아 있고, 지중해연안에는 모르·에스테렐 등 오래된 산맥이 있으며, 내륙에는 방투산·생트 빅투아르산과 같은 석회암의 작은 산이 있다. -레 보드 프로방스- ..

83.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 대통령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말기 한때 임시정부의 총리였던 드골은 전쟁 후의 총선거 뒤에 정당간의 협정에 실패해 하야한 뒤 제4공화국이 발족했다. 제4공화국 때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했다. 또한 8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과 그에 이어 계속된 알제리문제 등으로 내전의 위험까지 안고 있었다. -군 복무시절의 샤를 드골- 1958년 6월 국민의회에서 절대다수의 신임을 얻은 드골은 12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이후 드골은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헌법을 발의하고 국민 투표에서 통과되자 1959년 1월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드골은 대통령이 된 뒤 알제리문제를 일단 해결하고 프랑스를 세계에서 네 번째의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

82.제2차 세계대전

이 베르사유조약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도 역시 불황의 늪에 시달렸는데, 이에 프랑스정부에서는 식민지와 무역형식으로 하는 블록 경제체제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국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 또 한편으로 1930년대의 독일은 나치스가 집권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국제연맹 탈퇴, 재군비선언, 라인란트 비무장지대 점령,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주변나라를 합병하는 데에도 프랑스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이틀 뒤인 9월 3일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에 참전하였다. 1940년 5월 11일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

81.제1차 세계대전

나폴레옹3세가 즉위하자 당시 프랑스시민들은 그의 황제등극을 열렬히 축복했으며, 프랑스가 다시금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의 기대대로 나폴레옹3세는 전임 왕들의 폐단정리와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대외팽창을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으나,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그는 포로로 잡혀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 뒤 패전국이 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독일제국에게 넘겨주게 되었으며, 독일이 프랑스에 배상금인 50억 프랑을 요구하였으나 단 몇 개월 만에 이를 갚아 전 유럽과 독일,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독일의..

80.단두대에서 공개처형당한 국왕 루이16세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의 모순이 심화되어있었다. 구제도 아래에서 제 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여전히 면세특권을 비롯하여 봉건적 특권을 소유하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적인 부담들을 안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재정 상태는 사치스러운 궁정생활과 미국의 독립전쟁 등 대외전쟁 자금비용에 쏟아 부을 대로 쏟아 부어서 파탄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면세특권을 주장하여 재정문제해결에 근본적인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과 함께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미국의 독립혁명소식도 이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재정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789년 프랑스국왕 루이16세는 1614년 이래로 단 한 번도..

79.위그노 전쟁에 휩싸인 프랑스

1435년에 부르고뉴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서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1436년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되찾았으며,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근거지이었던 칼레 시를 떠나야했다. -프랑스의 역사적인 위그노 전쟁-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이전에는 별개의 독립 국가이었던 부르고뉴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가 입은 피해는 엄청났는데, 특별히 1348년에 흑사병이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상륙한 것이 피해를 심화시켰다. 샤를8세(재위 1483~1498년)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결국 1495년 2월 22일 프랑스군은 나폴리에 입성하고 샤를8세는 5월 12일 나폴..

78.천사의 계시를 받은 소녀, 잔 다르크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프랑스 병사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잉글랜드군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었기에 천사의 계시를 듣고 왔다는 어린 소녀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하였다. 잔 다르크는 이들 마음속에 쌓여있던 애국심에 불을 질렀고 빨리 전쟁을 끝내고 나라와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프랑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승리의 여신, 행운의 여신, 전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녀는 흰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병사들은 치솟는 사기로 영국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의 무모한 전투를 때론 반대하는 귀족세력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진실로 천사의 계시를 받은 탓인지 어려운 상황을 기적 같은 승리로 이끌어 내어 열세에 몰려있던 프랑스군을 ..

77.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중에 나타난 잔 다르크

-프랑스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레미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프랑스 북동부지역의 작은 마을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이고 백년전쟁시기 잉글랜드 편을 들던 부르고뉴공국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어 국가사이의 분쟁 시기에 환란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독실했던 잔 다르크는 16살 즈음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로부터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에 침범한 잉글랜드 군과 그들을 돕는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프랑스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 당시 프랑스의 발루아왕가는 백년전쟁기간동안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샤를6세의 아들 샤를왕세자는 프랑스 북부지역을 잃..

76.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중에 나타난 잔 다르크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4세가 남자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6세(재위:1328년~1350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여자가 직접 왕위계승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영국 왕 에드워드2세의 왕비 이사벨라(마지막 카페왕조의 국왕이었던 샤를4세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3세(재위:1327년~1377년)가 왕위계승자가 된다는 주장도 성립되었다. 이것을 핑계로 삼아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왕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사이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이때에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로 한 거대한 왕국을 세울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필리프6세 입장에서도 자신의 신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