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윌리엄 워즈워스(1770. 4. 7~1850. 4. 23)는 1770년 4월 7일 영국 컴벌런드 호수지방의 북서부 끝자락에 자리한 코커머스라는 유서 깊은 소도시에서 변호사의 5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워즈워스는 펜리스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코커머스 그래머스쿨에 입학했지만 채 여덟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글래스 미어는 한없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18세기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열세 살 때인 1783년, 그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났다. 조실부모의 경험과 아끼던 누이동생 도로시와 이별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뒷날 자신의 시에서 빈번히 가족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1787년에 워즈워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존스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정규 교과과정보다는 선배 시인들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에 더 열중했다.
1790년에 그와 벗 로버트 존스는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까지 여행했는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여행경험은『서곡』6권에서 상세히 서술된다. 대학졸업 후 두 사람은 북 웨일스를 거쳐 멋진 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와이강 계곡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1791년 11월 워즈워스는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프랑스로 건너갔다. 혁명지지자였지만 왕당파 지지자들과도 어울렸고, 아네트 발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792년 10월 말 프랑스를 떠나 12월 말에 영국에 도착했고, 그사이(12월 15일)에 두 사람의 딸 캐롤라인이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선언한 상황에서 워즈워스는 발롱과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795년 혹스헤드 그래머스쿨 시절의 벗의 동생인 레이슬리 칼버트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겨 준 900파운드 덕분에 그의 경제적 여건은 훨씬 나아졌다.
글래스 미어 자연풍경이 아름답고 유명한 곳에 시인 워즈워스가 살았던 집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도싯 주의 레이스다운으로 이주했고, 그는 이미 1793년에 알프스산맥 도보여행이 배경이 된『저녁 산책』과『소묘』를 발간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 가던 중이었다. 그는 이 시집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와 로버트 사우디(1774∼1843) 같은 시인들과 유니테리언파 신자인 출판업자 조지프 코트를 브리스톨에서 만났다.
1797년 6월 자신들의 집을 방문해 몇 주간 머문 콜리지에게 호감을 느낀 워즈워스 남매는 당시 콜리지가 살던 네더스토이에 가까운 서머싯의 알폭스덴하우스로 이주했고, 두 시인은『서정담시집』을 합작해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1798년 워즈워스는 도로시와 함께 와이 계곡을 다시 찾았는데, 이때의 경험은 널리 알려진『틴턴 수도원』으로 결실을 맺었다.
워즈워스가 브리스톨로 돌아온 직후 쓴 이 시가 포함된『서정담시집』은 1798년 9월 코틀의 도움으로 익명으로 발간되었고, 두 시인의『창조적 공생』의 성공적인 결실인 이 시집은 영국 낭만주의시대의 서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정담시집』이 발간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워즈워스 남매는 콜리지와 함께 배를 타고 독일로 갔고, 워즈워스 남매는 작센 주의 고즐라에, 콜리지는 괴팅겐에 머물렀다.
앰블사이드와 윈더미어 호수주변
도로시와 함께 혹독한 겨울을 고즐라에서 보내는 동안 워즈워스는 이른바『루시 시편들』과 대표작이 될『서곡 1∼2부』를 썼다. 이듬해 봄에 귀국한 워즈워스 남매는 1799년 12월 그라스미어의 더브코티지로 이주했는데, 이 집이 그가 호수지방에서 거주하게 될 세 집 중 첫 집이었다. 이곳에서 지낸 8년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서정담시집』2권을 추가했고, 이 시집은 여러 번 판을 거듭했다.
또 1805년에는 13권으로 구성된 자전적 장시인『서곡』을 완성했고, 또 다른 장시인『소요』를 쓰기 시작했으며, 1807년에는『합본 시집』을 발간했다. 1802년에 메리 허친슨과 결혼한 워즈워스는 1803년부터 1806년 사이에 세 자녀를 낳았다. 도로시의 생생하고 매혹적인 일기들은 이 행복했던 더브코티지 시절을 다루고 있다.
1808년부터 1811년까지 3년간 워즈워스일가는 앨런뱅크에 거주했고, 이곳에서 자녀 두 명이 더 태어났다. 1813년에 워즈워스일가는 앰블사이드와 그라스미어 사이의 라이덜 마운트로 이주했고,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814년에 워즈워스는 장시『소요』를 발간했고, 첫 두 시집의 수준에는 못 미치는 다른 시집들도 뒤따랐다. 1820년대부터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성공의 보상들이 잇따랐다.
페어필드산으로 향하는 중턱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으로 앰블사이드와 윈더미어 호수주변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워즈워드는 그가 사는 동안 이 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시상을 떠올리곤 했으리라“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그는 1838년에는 더럼대학교로부터, 1839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옥스퍼드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는“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843년에 사우디의 뒤를 이어 영국의 계관시인으로 임명된 그는 185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라스미어교회묘지에 묻혔다. 그는 13권으로 구성된 1805년분『서곡』을 생전에 발간하지 않고 평생 동안 끊임없이 다듬어 14권으로 재편성했는데, 그의 사후, 아내 메리 허친슨은 이 1850년분『서곡』을 처음으로 독자들 앞에 내놓았다. (해외저자사전, 2014. 5. 교보문고)
Rainbow(윌리엄 워즈워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low old,
아름다운 하늘의 무지개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by natural piety
무지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
아름다운 하늘의 무지게
차라리 죽음이 나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보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유종호 옮김)
필자는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즐겨 읽었었다. 그의 시를 좋아했던 필자가 윈더미어를 여행하면서 그의 일생을 살펴보았고 또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작품 가운데 그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듯하여 여기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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