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패션의 나라, 프랑스 일주여행

79.위그노 전쟁에 휩싸인 프랑스

달리는 말(이재남) 2022. 4. 13. 07:19

1435년에 부르고뉴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서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1436년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되찾았으며,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근거지이었던 칼레 시를 떠나야했다.

 

-프랑스의 역사적인 위그노 전쟁-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이전에는 별개의 독립 국가이었던 부르고뉴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가 입은 피해는 엄청났는데, 특별히 1348년에 흑사병이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상륙한 것이 피해를 심화시켰다. 샤를8(재위 1483~1498)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결국 1495222일 프랑스군은 나폴리에 입성하고 샤를8세는 512일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라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교황 알렉산드르6세는 이러한 프랑스군의 약진에 위협을 느끼고,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반 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결국에는 동맹군이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여 샤를은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후반 무렵, 프랑스의 개신교신자들인 위그노와 기존의 로마가톨릭세력들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어, 위그노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무려 36년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격렬해져갔다.

 

-처형되는 루이16-

 

그러던 중 위그노세력의 지도자인 부르봉왕조의 앙리4세가 즉위하여 종교 간의 대립을 중재하고자 개신교에서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간의 종교전쟁인 위그노전쟁은 종결된다. 이후 앙리4세는 국내 산업을 진흥시키고자 해외진출 등 추진에 힘을 써 프랑스의 왕권강화, 즉 절대왕정의 기초를 마련한다.

루이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강력한 절대군주제와 왕권의 강력통치를 위해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를 정비하여 재정확보를 위해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중용하여 중상(重商)주의경제정책을 실시해 나아갔다.

그럼에 따라 프랑스는 국내 산업을 크게 일으키고, 해외무역을 장려하여 국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등에 참전하는 등 대외 팽창정책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변하여 갔다. 그렇지만, 베르사유궁전을 짓느라고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소비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을 폐기함으로써, 상공업에 주로 종사하던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과 네덜란드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1789년 작-

 

이후 국력이 크게 소요되고, 루이14세의 말년에는 국력이 서서히 약해져 가면서, 이후 프랑스는 전쟁, 대외정책에 너무 무리하게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만성적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