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휴가

48. 울릉도의 약사

달리는 말(이재남) 2021. 1. 2. 10:25

울릉도의 약사  

울릉도는 우리나라 국토의 막내이며 사연이 많은 곳이다. 울릉도는 512(지증왕 13) 때 이사부 장군에 의하여 신라에 귀속되었다. 그 당시 울릉도를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으며, 우해왕(于海王)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때 신라 장수 이사부 군사가 처음 우산국에 상륙하여 이 작은 섬을 쉽게 정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단다. 그러나 바다와 험준한 산악에서 살아온 우산국주민들은 손쉽게 항복하지 않았고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지자 이사부 장군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쓰게 된다. 이 섬에 맹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착안, 나무로 사자 상을 만들어 불을 뿜어대는 위력을 발휘한다. 

울릉도 사동과 사동여객선터미널

울릉도 사동과 사동여객선터미널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놓아서 죽이리라하니그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고 쓰여 있다. 사자만 보아도 놀라운데 입에서 불까지 토해내는 바람에 섬사람들은 그만 항복하고 만 것이다. 백기를 든 우산국의 우해왕은 이 놀라운 나무사자로 우산국을 잘 통치해 달라고 유언과 동시에 자신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사부 장군은 항복한 우해왕의 유언을 들어 주기로 하고 그 나무로 만든 사자를 해변으로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이 사자상이 굳어져서 지금의 서면 남양리에 서있는 사자 봉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해 왕이 투신할 때 벗어 두었던 투구도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의 투구 봉이 되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우산국사람 백길토두로가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 때에 울릉도가 산림이 울창한데다 섬이 크고 토지가 비옥해서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왕이 전해 듣고, 1157(의종 11)에 김유립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려사에는 고려 현종 9년에 동북의 여진족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현종 때부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시대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와 살았다.

울릉의 관음도

울릉의 관음도에서 바라본 죽도

울릉의 관음도에서 바라본 삼선암                           

930(태조 13)에 우릉도, 덕종 때는 우릉성, 인종 때에는 울릉도 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울릉도는 조선시대 태종 이후 공도정책을 실시하면서 주민들이 살지 않았으나 숙종 19(1693),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였다1696(숙종 22)에 울산에 살던 어부 안용복 등의 눈부신 활약으로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주장이 끝나게 되었다. 그 뒤에 관리를 파견하여 3년마다 1회씩 울릉도의 순찰을 강화하여 일본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영국처럼 해양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와 송도라고 부르며 자주 건너와 울창한 산림을 벌채하였다이에 조정은 1881(고종 18)1882(고종 19)에 일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1882년에는 이규원 감찰사가 울릉도를 감찰하고 개척 명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이민이 시작되어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주민들이 살게 된 것이다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한반도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라는 고종황제의 명을 받들어 벼슬을 시행하던 김옥균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고종 19(1882)에 개척 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울릉도에는 한국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나라의 허락도 없이 몰래 들어와 도벌과 해산물, 약초를 채취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울릉의 코끼리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