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곤명여행

17.오삼계(吳三桂)와 진원원(陳圓圓)의 러브스토리

달리는 말(이재남) 2020. 7. 1. 06:21

오삼계(吳三桂)와 진원원(陳圓圓)의 러브스토리

 

오삼계의 연인 진원원(1624~1681)은 절강성 소주사람이다. 가난한 장사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곱 살 때 은전 두 냥이라는 헐값에 기방으로 팔려가 기녀생활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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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두뇌에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그녀는 어린 나이인 12세 때부터 장차 경국지색의 미모로 전국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1611~1644)의 향락을 위해 전국의 미녀들이 뽑혀나갈 때 진원원도 포함이 되었다. 악기, 노래, 춤과 기예까지 겸비한 그녀는 숭정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색이 강한 진원원에 푹 빠진 숭정제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갔다.

황제는 색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진원원을 멀리하고 옥체를 보존하시라는 어의들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숭정제 그는 당시의 변방, 산동성 산해관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방어하고 있던 총병관 오양에게 진원원을 하사하였다. 오양의 아들인 오삼계(1612~1678.10.2)는 진원원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오양은 늙은 자신보다는 혈기왕성한 오삼계에게 양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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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 진원원을 첩으로 삼은 오삼계는 한동안 북경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고 변방, 산해관을 지키는 임무를 위해 산동으로 떠났다. 연일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던 명나라가 멸망해가던 당시의 가혹한 세금수탈과 가뭄에 지친 농민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자성은 성난 농민들을 이끌고 무서운 속도로 승기를 잡더니 얼마 되지 않아 이 반란군은 북경을 빼앗았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는 북경이 함락되자 목을 매 생을 마감하니 그걸로 명나라는 패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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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오삼계는 산해관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는데 전념하면서 혹시라도 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가게 된다면 허술해진 국경경비를 틈타 만주족(여진족)이 넘어올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북경에 두고 온 가족들과 진원원이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 뒤 오삼계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달됐다.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접수한 후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과 가족들을 붙잡고 이자성 휘하의 장수 유종민이 오삼계가 북경에 남겨두었던 천하의 미인 진원원을 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개한 오삼계는 산해관의 문을 활짝 열고 여진족과 함께 북경으로 진격, 무서운 기세로 북경을 공략하여 이자성의 난을 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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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삼계는 이자성을 토벌하여 청나라가 명나라를 점령하는 길잡이를 하게 됐다. 이러한 공로로 오삼계는 1657년 평서대장군이 되어 패망한 명나라의 신하들이 세운 남명(南明)정권의 계왕(桂王:永歷帝)를 추격하여 1659년 원난성을 점령하였고 1662년 계왕을 미얀마까지 쫓아가서 잡은 공로로 평서친왕으로 봉해진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았고 운남과 귀주를 총괄하는 평서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과 진원원에 대한 처우만 잘했더라도 청나라가 명나라를 통치하는 일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삼계는 애첩 진원원 때문에 다른 민족인 만주족과 손잡고 자신의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진원원은 경국지색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오삼계는 귀주의 총관으로서 광동의 상가희, 복주의 경중명과 함께 삼번이라 하여 대단한 권세와 부를 누리다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16785월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