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팔의 여행

(11)-불교의 4대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마야대비사원

달리는 말(이재남) 2015. 11. 17. 06:04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의 마야데비 사원-보리수나무

    네팔과 인도를 오가는 짐꾼들

   네팔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중에 만난 마을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네팔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중에 만난 마을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가이드 라훌라와 요리사 둘리

     네팔에서 바라나시로 향하던 중 만난 음식점 주변의 촌노

네팔에서 인도로 넘나드는 국경선

 

 

불교의 4대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마야대비사원

 

 

여행을 시작한지 닷새 째 되는 날 새벽, 4시 30분이 되니 울리는 전화기의 벨소리가 바로 아침잠을 깨우는 신호다. 일어나 5시에는 호텔레스토랑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어제 저녁식사처럼 요리사 둘리가 몇 가지 한국음식들을 곁들어 준비해놓아 훨씬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호텔을 6시에 떠나 출발하기로 했는데, 서둘러 5시 30분에 출발하였다.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된다며 인솔자는 서두르고 있다.

어젯밤에는 룸비니의 도착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마야대비사원의 관광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으로 미루어진 사원의 관람을 하기위하여 곧장 사원을 향했다. 이동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새벽이었지만 사원의 문은 마침 열려있어 입장할 수 있다. 비록 입구로부터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배석인 어르신께서는 릭샤를 타고 안으로 들어오셨다. 릭샤란 인도나 네팔에서 저렴하고 빠르게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데 애용되는 유용한 운송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입장한 사원의 경내에는 때마침 많은 라마승들과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스님들이 불법을 행하고 있었으므로 경내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불교로 개종한 아소카 왕이 세웠다는 아소카 석주가 있는 곳에 모여 가이드 라훌라의 설명을 듣고,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출산한 뒤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연못, 마야대비 연못에 가서도 설명을 들으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저 부처의 땅인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선택된 축복을 받는 느낌이 든다. 약 2천 5백 년 전쯤에 히말라야 남쪽의 산모퉁이를 흐르는 로히니 강 근처에 있던 석가의 나라 정반왕의 왕비인 마야부인이 밤에 여섯 개의 황금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오른쪽 겨드랑이로 태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다.

해산달이 되자 왕의 허락을 받아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친정인 고리국의 선각왕께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동산에 도착하여 쉬어가게 되었다. 왕비는 그윽한 꽃향기로 가득한 무스나무(아소카나무)아래에서 오른손으로 그 나뭇가지를 잡고 몸에서 광채가 나는 왕자를 오른쪽 겨드랑이로 낳았다. 하늘과 땅은 환희의 소리로 가득 찼으며, 이때 비를 내려 그 몸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즉 부처님은 룸비니동산에서 마야왕비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셨으며, 탄생하시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하늘과 땅을 가르치며 강탄게(天上天下 唯我獨存 三界皆苦 我當安之)을 읊으셨다고 한다.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나 오직 나 혼자만이 존귀하다」는 「나」는 부처님 자신만의 존귀함을 나타낸 것이 아니요, 정각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이 있는 사물은 무엇이나 다 평등하게 존귀하다는 뜻이요, 「온 세계가 다 고통이니 내가 다 건지리라」하는 것은, 그 평등하게 존귀함을 모르고 무명 애욕에 얽혀 삼계를 오르내리니 모두가 이를 떠나 무상지존의 각자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니, 이는 크나큰 종교적 대 선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왕궁으로 돌아온 왕자는 싯달타라는「목적을 이루었다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고 나중에 부처님이 되셨다. 바로 이날이 음력 4월 8일이요,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다. 아소카왕의 돌기둥은 마야대비사원의 바로 서쪽에 서 있었는데 기원전 249년에 세운 것이란다. 파리어로 된 비문에는「아소카왕은 즉위 20년을 지낸 해에 스스로 이 땅을 참배하고, 이 돌기둥을 세웠다. 석가모니 붓다는 여기서 태어나다.」고 적혀 있다. 그때가 부처님 탄생으로부터 210년 뒤의 일이었다.

마야대비사원의 곁에 보리수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는 목욕을 했던 못을 싯달타 못이라고 하는데 왕비가 출산 전에 몸을 씻고 왕자의 해산 탕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모습은 후세에 정비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각을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엔 부처님께서 도의 깨달음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도하신 곳을 붓다가야라 하고 , 앉아 계시던 나무를 보리수(菩提樹), 그 자리를 금강보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보리수나무 밑에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2549년 전, 쿠시나가르의 사라사나무가 쌍으로 있던 나무아래서 가사를 네 겹으로 깔고, 고국인 카필라국을 향하여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신다. "모든 것은 바뀌어가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저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그렇지 아니하다면 ”법(진리)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과 관련지어진 무스나무와 보리수나무, 그리고 사라사나무, 이 세 종류의 나무가 모두 마야대비사원 안에 서있다. 관람이 끝나고 경 입구로 돌아오니 마침 불법의 끝이 나면서 경 밖으로 나오는 스님들 뒤로 신발을 벗고 어두운 당내로 들어가니 정면에 석가탄생을 새겨놓은 석상이 원형을 잃고 서있다. 그 곁의 작은 복원상을 보면 아소카나무 가지에 오른손을 걸친 왕비 마야와 중앙에 서서 천지를 가리키는 왕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 밖으로 나오면서 엄청나게 큰 보리수나무를 배경삼아 사진을 또 찍었다. 사원을 나서며 사원입구의 입장표를 관리하는 네팔여성을 만나 그녀의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그녀의 의상이 전형적인 네팔여성들의 복장이기 때문이다.  May I take a picture of you?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여 얼른 한 컷을 찍고 그곳을 떠나왔다.

밖으로 나와 연못가에 아름답게 핀 꽃을 배경으로 아내의 사진, 몇 장을 찍고 있는데 다리 장애인 소년이 구걸을 하고 서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미화 1불을 그의 손에 얹어주고 있는데 릭샤꾼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일행이 사원을 떠나 전용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을 때, 반대 방향으로부터 수많은 현지인들이 사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젊은 한국인 배낭여행자들과 성지순례를 다니는 불교신자들이 끼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