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일주여행

발칸반도 일주여행(10)-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달리는 말(이재남) 2015. 6. 17. 07:31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차우체스쿠 궁의 야경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차우체스쿠 궁의 야경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의회궁의 야경 

루마니아 브라쇼브 구시가지의 건축물 

루마니아 브라쇼브 구시가지의 건축물 

루마니아 시나이아 펠레슈성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공화당광장이라 불렀던 혁명광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설명을 들었다. Str.Calea Victoriei 를 걷다보니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가 마지막연설을 하던 광장이 나타났다. 차우셰스쿠는 국민들이 변함없이 자기를 지지하며 찬양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연설을 시작했으나 도중에 자신에게 성난 군중들의 외침을 듣고 당황하여 헬리콥터를 타고 비상탈출을 하였다.

당시 성난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시민들에게 무차별사격을 가했는데 당시의 시위광경은 TV전파를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광장주변에는 공화국궁전 당시 차우셰스쿠 대통령관저가 현재는 국립미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구 공산당본부, 대학도서관, 아테네음악당, 크레출레스쿠 정교회, 힐튼호텔(5스타) 등으로 둘러 쌓여있다. 이 궁전은 1984~2020년까지 건축계획이었으나 1989년 혁명으로 인하여 건축이 잠시 중단되었었다.

건축할 당시는 인민들을 위한 집이라 하여「인민궁전」이라 명칭을 붙였으나 실제는 차우셰스쿠부부가 자신들과 공산당중앙위원회 그리고 인민회의사무실로 쓸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197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에 있는 김일성주석궁을 둘러본 후 감동하여 자기도 언젠가는 이런 궁전을 짓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주위에 거주하던 주민 1만 여세대가 보금자리를 잃었고 중세의 고색창연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당시 3천여 명의 일꾼들이 징용되었고 700여명의 건축가들이 동원되었으며 그중 최고책임자는 당시 28세의 젊은 여성이었다. 정면의 길이가 270m, 높이가 84m, 지하92m, 큰방의 숫자가 1천여 개, 작은방의 숫자가 2천여 개, 합 3천여 개의 방이 있으며 단일 건물로는 미국 펜타곤국무성건물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1989년 혁명당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공사를 재개하여 거의 마무리단계에 있다. 차우셰스쿠는 가고 없지만 마이클잭슨이 루마니아공연차 왔을 때 이곳광장에서 공연을 하였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면 기둥과 벽은 루마니아 전역에서 모아온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순수한 루마니아기술자와 자재만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국제학술회의장과 하원의원 사무실, 그리고 개인에게 결혼피로연회장 등으로 임대를 해주고 있으며 관광객들을 위하여 방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그는 1918년생이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방 2칸에 10명의 식구가 함께 살았다. 그의 환경이 그를 극도의 사회주의자로 만들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학교를 중퇴한 그는 부쿠레슈티에서 구두수선공이 되었고 수차례에 걸쳐 감옥생활을 했으며 이런 경력이 그가 공산당원으로 굳게 자리를 잡게 되는 인맥이 이루어졌다. 특히 루마니아 최초의 당서기장을 만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공산당서기로 일하면서 무도회장에서 그녀의 아내가 될 엘리나를 만났고 1930~1944년에 감옥생활을 했다.

덕택에 갑자기 성장하여 30대의 나이로 서기장 오른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소련공산당회의에서 돌아오지 못한 게오르게 데지 서기장의 후임자로 지목되었다. 차우셰스쿠 그는 서기장 초기시절에는 자유로운 공산당을 운영하면서 자동차, 땅 등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정책과 결혼하면 집과 직업을 주고 휴가기간을 주는 모범적인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래서 루마니아경제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그는 중국, 북한과 잦은 교류를 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여 결국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평양을 방문하는 회수가 많아지면서 개인숭배를 강화해나가게 되었다. 김일성의 주석궁을 본 따 차우셰스쿠궁전을 건설하였는데 그 시설이 호화롭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내부의 방이 500개에 국빈을 맞이하는 산텔리아의 화려함이 우리 같은 방문객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궁전이 마무리되기 전, 그가 연설하는 중 「차우셰스쿠 물러나라.」는 한 인민의 외침에 온 국민이 동조하게 되고 결국 27년의 통치를 마감으로 1989년 12월 25일 유혈혁명으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 궁전과 너른 광장 앞의 4km에 이르는 도로와 분수는 매우 아름답다. 가이드 송용기씨는 어제 밤부터 우리일행을 위해 가이드역할을 친절하게 잘해주었다. 그렇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끝이었으므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됐다. 그는 인사를 하고 떠났고 야경으로 혁명광장을 둘러본 우리는 호텔로 돌아오니 이미 10시 25분이 됐다. 여행이야기를 써야하겠고 그뿐만이 아니라 캠코더와 디지털카메라의 충전을 해야 하며 짐 정리도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