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시리아 요르단 두바이여행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요르단과 두바이의 여행(18)-「가데스 바네아 사건」

달리는 말(이재남) 2014. 4. 23. 05:36

                                                          

요르단 느보산의 유물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입구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의 모습  

고대 무역로 왕의 대로변에 위치한 고대도시 페트라 입구에서 만난 요르단 소녀들



「가데스 바네아 사건」



시나이 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11일이 걸리는 거리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장소는 가데스 바네아일 것이다. 가데스 바네아(Kadesh-Barnea)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38년을 더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온 지 13여 개월이 지나 가나안 접경지역인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모세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모두 12명을 선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다.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명은 가나안에서 가져온 과일 즉 포도, 석류, 무화과 등을 보이며 그 곳은 정말「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고 보고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을 성경은 가나안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살기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보고가 이어진 것이다. 이유인 즉,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가나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모두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던 거주민들 가운데는 아낙 자손들처럼 신장이 장대한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백성들 모두가 신장이 장대한 자라고 한 것은 아낙 자손들로 인해 겁을 먹은 정탐꾼들의 과장된 보고였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자들 중에서 여분네(Jephunneh)의 아들 갈렙(Caleb)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눈(Nun)의 아들 여호수아(Jehoshua)도 갈렙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고 반박했다. 더욱이 자신들은 아낙 자손들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았다고 겸손해 했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백성들은 마치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로 한 듯 긍정적인 보고를 한 갈렙이나 여호수아보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말을 더 믿었다. 이에 백성들은 크게 낙심하여 소리를 지르며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들은 모세(Moses)와 아론(Aaron)을 원망하며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원망은 하느님께로 이어졌다."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맞아 죽게 하시는가?" 하느님께서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사십 년 간의 광야 생활」이라는 형벌을 내리셨다.
사십 년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친 것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38년을 더 광야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가데스 바네아」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