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마카오,심천

홍콩, 마카오, 심천 여행(3)-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

달리는 말(이재남) 2013. 3. 29. 11:32

                                                      

 홍콩 리펄스베이의 틴하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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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카오 카지노 호텔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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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천 시내의 건축물

     중국 심천의 금수중화 소인국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

 

이외에도 수백 개의 전통 도교사원과 불교사원, 성지에는 많은 역사적인 유물들이 남아있다. 세계사에 있어서 영국의 진출은 홍콩의 출현을 의미한다. 19세기 초에 영국 무역상들은 홍콩에서 중국의 은, 비단, 차와 향료를 아편과 교환하여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결국 중국정부는 새로운 아편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반면에 영국은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안전한 항구를 오랜 동안 찾고 있었다. 이것이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영국이 승리를 거둬 홍콩 섬이 1842년 난징조약의 체결 하에 영국 측에 할양되었다. 센트럴 구역의 한 거리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는 헨리 포팅거경이 최초의 홍콩총독이었다.

홍콩에서 중국의 활발한 무역활동은 영국과의 잦은 충돌을 유발했다. 영국은 유리한 방어벽이 되는 홍콩영토를 더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구룡반도와 스톤커터스 아일랜드가 1860년에 추가로 할양되었으며, 1898년에는 신계지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99년간의 조차조약도 체결되었다.

홍콩의 도시 전체는 중요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갖추게 되었다. 피크트램 케이블 철도가 1885년에 완공되었으며, 이어 1904년에 새로운 트램철도 시스템과 1910년에 새로운 광동철도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홍콩은 그때 당시 매년 약 11,000여 척의배가 드나들었으며, 10년 후에는 그 숫자가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상업이 활기를 띰에 따라 신종산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중일전쟁 발발, 제2차 세계대전과 1949혁명 등 많은 사건이 홍콩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홍콩은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주는 등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정책을 펼쳤다. 1950년 홍콩은 제조업, 산업 중심지로서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메이드 인 홍콩이라고 찍힌 모직, 전자제품, 시계와 이 외의 다양하고 저렴한 상품들이 엄청난 양으로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오늘날 금융서비스 산업이 제조업을 제치고 홍콩의 주도적인 산업이 되었다. 홍콩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규모의 금융 중심지이며, 1991년 이래로 세계 10대 경제권에 포함된다.

반면에 제조업 부문은 상당부분이 해외로 이전되고 있으나, 여전히 홍콩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 중 하나이다. 꾸준히 삶의 지표를 향상시켜온 복지정책은 이 부문에서 서구 선진국에 필적하고 있다. 중국은 홍콩의 할양을 가져온 세 가지 조약이 불평등하게 체결되었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해 왔으며, 마침내 1984년 중,영 협상이 체결되어 1997년 7월1일 홍콩반환이 실현되었다.

비록 홍콩 섬과 구룡반도가 이론상 영국령이나 실질적으로 신계지와 더불어 중국 령으로 귀속되었다. 1997년 7월1일 홍콩은 1국가 2체제라는 독특한 체제하에 중화 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 기본법으로 불리는 헌법은 정치, 사회, 경제체제를 유지할 것을 보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홍콩은 향후 50년간 고도의 자치권을 누릴 것이다.

홍콩은 홍콩주민이 이끌어가며 특별행정구 행정수반을 비롯한 고위 장관의 자격은 홍콩에 장기간 거주한 사람으로 한정된다. 1998년 5월 새로 선출된 입법회의는 홍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될 것이다. 비록 홍콩반환이 방문객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실제적인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