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세부여행

8.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난도 마젤란과 세부섬의 역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18. 16:38

                                  

호핑투어를 하기 위해 잠자리배를 타고 가는 모습 

아름다운 바닷속의 풍경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난도 마젤란과 세부섬의 역사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본다면 1519년 8월 10일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난도 마젤란의 지휘아래 237명의 선원을 태운 5척의 배가 스페인의 세비야를 출발했다. 유명한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스 섬을 찾아 나선 이 스페인 항해사들은 2년간의 고된 항해 속에서 브라질의 케이프 베르데 섬을 통과했다.

1521년 3월 16일 이들은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다. 그날 이후 마젤란은 위도 계산의 오류를 발견하였고 북쪽으로 10도 떨어진 호몬혼이라는 알 수 없는 섬을 지나게 된다. 탐험을 계속한 끝에 마젤란과 그 부하들은 하나의 섬이 아니라 군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젤란-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초상화

 

1521년 3월 29일 마젤란이 레이테의 리마사와 섬을 발견하였고 첫 기독교 미사가 이루어졌다. 리마사와의 소박한 편안함은 오랜 항해로 허약해진 항해사들에게 장기간의 휴식을 제공했고 여기엔 마젤란의 충직한 말레이인 노예였던 엔리크 말라카의 도움이 있었다.
마젤란의 통역으로서 그는 항해사들을 현지 주민들에게 소개했다. 일주일간의 휴식과 풍부한 음식을 통해 원기를 회복했다. 쿨론 (레이테), 푸손 (카모테), 주부 (세부) 등 세 섬에서 배에 필요한 물품들을 용이하게 보충한 마젤란과 그 휘하의 승무원들은 리마사와 왕의 후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포르투갈 항해사와 그 부하들이 배를 세부항에 정박시키고 세부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521년 4월 17일이었다. 마젤란의 기록 담당이었던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초기 세부의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집은 통나무로 지었고 사다리가 있었으며 지붕은 야자수 잎으로 덮었다. 태국, 중국, 아라비아 등지에서 온 많은 범선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사람들은 도자기 식기를 사용하였으며 많은 금과 보석을 사용하여 몸과 옷을 치장하였다.

 

마젤란의 항해코스-16세기 초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이다. 마젤란해협과 태평양, 필리핀, 마리아나제도 등을 명명하였다

 

술은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맨 몸에 문신을 했고, 은밀한 부위는 바하구이로 가렸으며 머리에는 실크 터반을 둘렀다. 여자들은 스페인 여자들만큼 희고 키가 컸으며 상반신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상류 계급 여자들은 허리에 묶은 사각 천 셔츠 위에 참바라라고 불리는 자루처럼 생긴 블라우스를 입었다. 여자들은 입술과 손톱을 밝은 색으로 칠했으며 보석으로 몸치장을 했지만 모두 맨발이었다.'

후마본 왕과 유아나 왕비를 비롯하여 400여명의 주민이 세례를 받으면서 세부에서 종교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후 기독교가 필리핀의 섬 전체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로의 개종이 진행되면서 주민들은 스페인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1521년 4월 28일 용맹한 전사 라푸라푸에 의해 마젤란이 살해된 후 세부에서 스페인사람들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부 막탄섬 포트 산 페드로 요새는 스페인 통치 시절,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항구에 만들어진 곳으로 스페인 분위기가 진하게 나는 유적지이다. 특히 산페드로 요새는 400년에 가까운 스페인의 총치 시절을 겪고, 미국의 식민지로, 일본의 식민지로의 험난한 필리핀의 역사를 담고있는 곳이다.

 


마젤란의 죽음 이후 40년 만에 스페인의 정복자 미구엘 로페즈 드 레가스피와 프라이 드 우르다네타가 세부를 정복하기 위해 스페인을 출발하여 1565년 4월 27일 두 번째 스페인 정복자로서 세부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