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러시아여행

8.시원치 못한 정부의 통치를 받는데 매우 익숙해진 러시아국민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17. 08:22

시원치 못한 정부의 통치를 받는데 매우 익숙해진 러시아국민

                        

러시아 국민은 시원치 못한 정부의 통치를 받는데 매우 익숙하다. 무려 천년 동안이나 거의 언제나 무능한 통치자를 모시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넓은 영토에다 수많은 소수민족이 뒤섞여 사는 탓으로 정부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관료 조직은 돌아버릴 정도로 많다. 관료조직을 만들면 수지가 맡기 때문이다. 일당 독재가 지배했던 시절 러시아에는 정당 하나가 무수히 많은 돈을 잡아먹었다. 부정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인 현상이며 그 정도는 요즈음이 옛날보다 더 심한 편이다.

이 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기술자는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모두 누리려고 한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라면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러시아에서는 세 사람이 필요하다. 장비가 하나 있으면, 한 사람은 운전하고 또 한 사람은 작동을 하고 나머지 하나는 감독을 한다. 또 임금은 모두 현찰로 지불해야 한다. 아무도 은행을 믿지 않고 대출 제도도 없다. 각자 자기만을 믿고 사는 것이다." 고 말한다.

 

모스크바의 키예프 역과 쇼핑몰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외벽이 한국 전통 문양으로 둘러 쌓여 있다.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한국 정자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오묘한 조화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지위, 권력, 돈, 이 세 가지가 이 나라에서 중요한 전부이다. 만약 어떤 러시아인에게 자신의 미래가 당신에게 달렸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것이다. 그들은 보험도 재산도 노후 연금도 없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사는 어느 프랑스인의 설명이다. 오로지 돈에만 집착하는 신종 러시아인들은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교통법규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팔에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달고 다니며, 집에는 값비싼 욕실을 만들고 늘 외국으로 돌아다닌다.

 

알프스산맥을 넘어 러시아를 침공한 1812년 6월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의 프랑스군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파노라마 전쟁기념관, 즉 전승기념관은 1812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와 싸운 전쟁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고는 러시아의 문화와 유적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작품이 이곳에 그려져 있다. 1812년 6월 당시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15만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원군으로 구성된 약 6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러시아를 침공했다. 이미 많은 나라를 침공하여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은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를 침공하게 된다.

            

모스크바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후 파괴된 모스크바 건물들의 잔해로 지어진 건물

 

이 소식을 접한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인 애꾸눈 후트조크장군은 이 사실을 러시아의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이 장군의 작전대로 모스크바의 서쪽 보로지노 촌락을 방어기지로 설정하고 전쟁을 하지만 결국은 러시아가 패하고 만다. 그 해 9월14일 나폴레옹은 드디어 크렘린에 입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벅찬 기대와는 달리 모스크바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는 텅 빈 도시였다. 병사는커녕 시민들의 그림자조차 없이 도시 전체가 잠자고 있는 듯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는 원인 모를 큰 화재로 인하여 거의 불탔으므로 프랑스대군이 먹고 잠을 잘 집조차도 사라지게 되었고 식량도 계속 모자랐다. 여기에다 추위는 예년에 비해 더욱 혹독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하면서 그 많은 나라의 수도만을 골라 침범하고, 항복을 받아내면서 여러 나라를 빼앗게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므로 나폴레옹은 마침내 방심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크렘린의 무기고(박물관)-이 박물관 앞에 놓여있는 대포는 1812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빼앗은 것을 전시해놓았다.

 

그 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불러 모은 러시아군은 모스크바 외곽을 2중3중으로 포위하고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해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립된 나폴레옹군은 그 동안 추위는 더욱 극심해졌고 식량도 떨어지고 더군다나 전염병이 만연하여 아사자가 속출하게 됐다.

결국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11월초에 군대를 해산하고 자유행동을 취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퇴각로를 열어주는 척하면서 쫓겨 가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뒤쫓아 가며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전쟁을 펴나갔다.

그해 말, 살아서 되돌아간 나폴레옹 병사는 채 5만도 안 되는 숫자에 불과 했다. 그런데 러시아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여세를 몰아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결국 러시아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항복각서를 받고, 그 나폴레옹 자신은 외딴섬으로 귀양을 가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때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잡아온 화가 50여명과 러시아인 화가 50여명으로 하여금 그 때의 전쟁기록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보로지노전쟁을 그린 115m의 그림을 파노라마전쟁기념관에 동그랗게 천장까지 배치하였다. 전쟁으로 하여금 폐허가 된 현장을 실물로 아랫부분에 배치하여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해놓았다. 그래서 마치 필자 자신이 그 전쟁터에 서있는 느낌을 주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쟁파노라마를 엮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잘 표현된 파노라마의 현장은 사진촬영을 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곳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촬영할 수 없었다. 그 그림을 구경만 하고 밖으로 나오려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모스크바 레닌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