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일본여행

우리 남산타워와 맞먹는 동경타워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8. 06:52

 일본여행을 다녀와서(3)-우리 남산타워와 맞먹는 동경타워 

 

 일왕이 거주하는 왕궁(황거)

 

 우리나라의 남산타워와 맞먹는 동경타워

 

우리일행이 황거로부터 옮겨간 곳은 동경 타워였다. 높이가 무려 333m나 된다고 자랑하는 곳,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은 150m정도이었으나 동경만의 동경 시내를 충분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남산에 위치한 남산타워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1991년의 동경은 동경만을 끼고 높은 빌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몹시 비대해진 몸짓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면세점 명품 브랜드 매장

 

 

털보 이 씨는 나리타공항에서부터 우리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한국인 유학생이었는데 얼굴에 털이 많으니 털보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동경이 에도로 불렸을 때 쇼군(將軍)을 중심으로 다이묘(大名)와 무사가 거주하는 지역, 이를 야마노테로 불렀고, 상인이 거주하는 지역, 이를 시타마치로 불렀는데 이두 지역으로 구별이 되었다.

이는 근대화가 된 뒤에도 그 구별이 잔재해 있어서 현재에도 시타마치에는 상인이나 노동자의 주택이 많고, 이에 반해 야마노테에 주택가가 많아서 문화,교육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강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동경의 과밀화 방지를 위한 수도권계획의 일환으로 동경 인근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 중,고층 주민들의 공동주택단지가 세워졌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으로 들어가기 위한 대표적인 현관인 나리타(成田) 신 동경 국제공항이 들어서 있었다.

도쿄타워

      도쿄타워

 

 

일본의 정치, 경제,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지인 도쿄의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일본 전체를 통일하여 통치하던 한 시대의 일본의 영웅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그의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늦게야 아들을 두게 되었고, 친아들과의 세력다툼이 염려된 나머지 오사카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도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쫓아 보냈으며 이곳을 다스리게 했단다.

17세기가 되어 갈대숲으로 무성했던 이곳 벌판을 오늘날의 도쿄가 있게끔 발전시켜 놓은 장본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었다. 얼마쯤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그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일본을 통치하고 있었다.

한편 도쿄에 쫓겨와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든 도쿠가와는 오사카로 쳐들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아들을 죽이고 수도를 오사카에서 도쿄로 옮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설치함으로써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오사카성으로부터 내려다본 오사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265년에 걸친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되고 천황이 권력을 회복한 뒤, 교토(京都)에 살고 있던 천황이 에도로 옮겨와 동경으로 개명하여 현재까지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고 털보 이 씨는 도쿄에 얽힌 배경 설명을 들려주었다.
지금의 동경은 일본의 정치, 경제,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 경제의 중심 도시로 변모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天正 18년(1590년) 8월 1일 에도 성에 입성했을 때, 성은 낡고 누수가 심하고, 앞에는 수렁 같은 히비야(日比谷)의 후미진 곳에 있었고, 서쪽으로는 무사시노(武藏野) 지역으로 잡목림이 우거져 있었단다.
그래서 우선 물자를 운반하는 수로를 만들고 성(城)의 수축(修築)과 성의 주변 마을의 건설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2대째의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까지 밤낮으로 공사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1868년 에도 시대는 쇄국정책으로 외국과의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부키(歌舞技)등과 같은 일본 전통적인 문화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경의 긴자(金座)거리에 빨간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늘어서고, 도로에는 가스등이 설치되는 등의 생활전반에 걸친 문화의 변화가 일어났다.

도쿄타워


 

동경타워로부터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게 된 곳은 미선장 시부야점 이었고 그 곳에서는 한식 부패로 푸짐하게 그리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녁 7시 30분쯤 메그로역(Meguro-Dori) 근처에 위치한 미야꼬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최대범 선생님과 316호실에 투숙하게 되었으며, 습기가 많은 이곳에서는 덥고 끈끈한 날씨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장을 풀자마자 샤워부터 해야만 했다.

 

도쿄 미야코호텔

 

 

필자는 최 선생님과 같이 매그로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곳의 개인 주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피곤하고 낯설기도 하여 곧 호텔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TV 시청도 하고, 오늘 하루 관광한 여행이야기를 메모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8월8일, 여행 둘째 날 아침은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부터 했다. 아침식사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8시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일행의 오늘 일정에 관한 협의를 하기 위하여 레스토랑 앞 소파에서 잠깐 모임을 가졌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에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고 메그로역에 도착 J. R.(Japan Railway Lines)선 전철을 타고 신주쿠 역에서 내렸다. 쇼핑과 유흥의 거리이자, 젊은이들의 풍속 문화가 자유롭게 표현되어 온 정열적인 번화가요, 일본 대중 유흥문화의 산지가 바로 신주쿠(新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