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대륙 서북쪽의 섬나라, 영국 일주여행

69.바이킹의 역사『더블리니아 박물관』

달리는 말(이재남) 2023. 1. 30. 07:44

바이킹의 역사『더블리니아 박물관』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과 연결된 더블리니아(Dublinia)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역사이자 바이킹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이다. 더블리니아는 그냥 관람만 하는 그런 시시한 박물관이 아니라 바이킹이 이용하던 갑옷과 투구, 무기들을 직접 입어보고 만져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그 외에도 멋진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과 인접하여 입장권 한 장으로 바이킹역사와 더블린건축물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다. 최근에 영화로 나와 우리가 잘 아는 오딘과 오딘의 아들 토르는 북유럽신화 중 일부이자 바이킹의 종교였다. 항상 바다를 항해하는 바이킹에게 신의 존재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더블린에 정착을 하고 가톨릭교의 전파에 따라 점점 약하게 되었다.

 

-더블리니아 박물관 입구 방향표시-
-더블리니아박물관 건물-

더블린의「더블리니아 박물관」은 바이킹이 아일랜드에 이주하여 정착하며 몇 세기를 보낸 적이 있는 이곳은 그 바이킹의 유물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900년도에 겨우 바이킹을 추방하지만 끈질긴 바이킹들은 다시 돌아와서 더블리니아 주변에 정착하게 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더블리니아 주변에는 강이 있어 바이킹이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바이킹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약해진 더블린은 결국 1172년에 잉글랜드로 인해 침략당하고 식민지가 된다.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도 1348년에 더블린에 상륙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당시에는 치료기술이 발전하지 않아서 단순한 질병도 치료하지 못하고 쉽게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가족을 잃는 슬픔은 지금이나 이전이나 똑같았을 것인데,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았던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그 아픔을 안고 살았을까?  
1800년대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인구의 반 정도가 아사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대기근이 발생한 이유는 그렇지 않아도 당시 잉글랜드의 수탈로 먹을 것이 없었는데 엎친데 덮쳐 주식이던 감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먹을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구수로 복구하는데 2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더블린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어두운 역사밖에 없는 나라도 드믈 것 같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더블리니아 박물관, 불쌍한 소녀 그때 그 시절에도 인신매매가 성행했으며 어쩌면 당시 시대관으로는 지금보다 만연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블리니아-바이킹들의 이동경로-

항상 바이킹이나 잉글랜드의 침략을 당하고 질병에 걸리고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이코노미스트지 조사결과 삶의 질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한다. 더블리니아에서 바이킹의 투구와 갑옷 특히 체인이 감긴 갑옷은 무거워서 혼자 입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어떻게 뛰어다니면서 전투를 했을까?  장검 같은 경우는 제대로 들기도 힘들지만 생각해 보면 가능할 것 같다는데 생각이 머무는 건 노르웨이 사람들은 몸뚱이가 큰 것으로 미루어봐 그 정도 거구들이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더블리니아-바이킹은 배를 잘탔으니 당연히 유능한 무역상이었다-
-더블리니아-지리적 특징덕분에 더블린은 빠르게 다문화사회로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