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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21)-이스라엘의 중세 약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5. 10. 21. 06:08

                                                                

                                                       이스라엘의 중세 약사


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해서 과거 지파동맹의 중앙에 더 가까이 있었지만 가나안족 주민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고 지리적 여건으로는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다. 더욱이 유다는  확실한 왕조전통을 이이어가고 있었으나 이스라엘로서는 전통의 맥을 잇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내정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BC 8세기에 그나마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와 여로보암 2세가 유능했으므로 그리고 유다는 아마샤와 웃시아 때에 유능한 통치자들 덕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과 번영을 누렸다. 그렇지만 북쪽의 왕국은 건전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매우 부패된 상태였다.

이시대의 아모스와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어 당시의 부패된 사회적 모순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살아온 500년간은 특별히 강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BC 8세기중엽 이후에는 제대로 제국건설의 길로 들어선 아시리아가 있어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북쪽의 나라가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지내게 된 것은 여로보암의 사망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뿐인가. 유다는 아시리아를 섬기는 신하의 나라가 되더니 다음으로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었다가 또 그다음에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더니, 결국에는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스스로 망하게 되는데, 그 때가 BC 627년, 아하스왕 때였다. 

유다의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했었던 유다의 젊은 요시아왕이 그 시절에 나타났다.  그러나 요시아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지만, 자기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이집트의 봉신으로써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는 바로 여호아하스의 형제인 엘리아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요시아가 전사한지 불과 3개월 후였다. 그래서 독립국가로서의 유다는 20년도 채 유지하지 못했다.

한때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이스라엘과의 공동체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우고 새롭게 공동체를 만들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삶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대교가 탄생한 것은 그들이 포로생활 가운데 그것을 극복하면서  부터다.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 지도층들은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비록 소수이긴 하였지만 이 나라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집트로 들어간 것은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로 흩어져 떠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참회가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가 곧 권능과 무한한 자비로써 그들의 양떼를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알리는 천상의 말씀을 들었노라고 제2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가 역사를 주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국민들이 믿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바벨론은 멸망하기에 이르렀고 바벨론의 고레스는  팔레스타인 유대인공동체의 재건을 명하는 포고령을 공포하게 되는데 그때가 그의 재위 1년이었다. 그로 인하여 유대사람들은 돌아올 수 있었지만 재건은 역경과 좌절 속에 헤매던 유대의 공동체를 이루는 신앙의 결집이 필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 구심점이 야말로 성전의 건축이었다. 드디어 구심점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선지자들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위계승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싸이자 성전을 다시 건설하는 일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선지자들의 뜻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페르시아제국 안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역사는 페르시아의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페르시아 내의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성전을 다시 이룩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계속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BC 5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느헤미아와 에스라 때문에 유대인의 공동체가 잘 편성되었다. 이때의 마케도냐에 있던 알렉산더는 수많은 국가를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내륙지방역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물결 때문에 팔레스타인도 1세기 동안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럴 즈음 이집트의 유대인수는 점점 늘어났으며 그들은 헬라어를 모국어로 선택하였다. BC 3세기에는 성경말씀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이 개시되었는데, 이때 번역했던 번역본이 70인 역이다. BC 198년 셀류코스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을 합쳐나갔다.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성묘교회의 예수님의 무덤

 예루살렘 시가지의 모습-마리아 막달라교회(러시아정교회 소속)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골고다언덕의 성묘교회 내부

 예루살렘의 모습

 예루살렘의 다윗성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골고다언덕의 성묘교회 내부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골고다언덕의 성묘교회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