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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20)- 이스라엘의 고대 약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5. 10. 20. 06:03

 

 예루살렘의 묘지

  예루살렘의 Shalom Hotel 앞

 예루살렘의 성

 예루살렘의 성

 예루살렘의 시온문

 예루살렘의 시온성지하도

 예루살렘의 모습

 예루살렘의 모습

 예루살렘의 모습

          예루살렘의 모습

                

                                                        이스라엘의 고대 약사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와의 언약을 통해 형성된 한 민족의 역사이자 이스라엘의 종교사라고 할 정도로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경이야말로 곧 그들의 역사이다. 그리고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의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또한 이스라엘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미 BC 7000년대에는 성경의 무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역에 걸쳐 정착한 촌락들이 있었다. BC 2000년대 전반을 이스라엘의 기원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여서는 BC 13세기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한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지만 이보다 훨씬 먼저 반유목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다. 여러 가지 설화들에 비치어 볼 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동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해서 진행된 복잡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시대이전의 팔레스타인주민을 가나안인 또는 아모리족이라 부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출애굽을 통해서이다. 이 출애굽의 연대는 대략 13세기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독특한 신앙을 받아서 하나의 민족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모든 분야에서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이스라엘신앙의 위대한 창시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지파들을 세검으로 소집하였다. 이스라엘의 장로, 어른, 법관, 공무원들이 그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 앞에 나서자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셨소, “옛적에 너희 조상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저 편에 살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나는 그 강 건너 저편에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다가 이 땅을 샅샅이 밟게 하고 많은 후손을 보게 해 주었다. ,...”」 (여호 24:1~42)』

.이렇게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는 하느님과 백성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관계에 대한 강렬한 인식, 즉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스스로 헌신하였다는 믿음을 구심점으로 삼았다.

한동안 어두운 시대에 봉착한 이스라엘은 베냐민지퍼사람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사울은 블레셋인들에게 저항을 했고 여호와의 대적들과 맞서 싸우는 사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그가 맡은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통치기간 모두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고 봐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사울은 정신적인 이상을 보였다. 이때 베들레헴 출신의 젊은 다윗이 등장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였고 다윗은 유다의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다. 마침내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사울의 아들 에스바알과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나라의 왕이 되었다.

에스바알은 2년을 통치하고 죽게 되자 다윗에게 모여든 백성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남북부지역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정치적수도만이 아닌 종교적수도로 만들려는 다윗의 의향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정복사업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및 수리아의 제일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영토를 위협할 만한 적이 없었던 때라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는 산업과 교역에 온 힘을 쏟아 나라의 경제를 유리하게 끌고 나갔다.

솔로몬 왕 때에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는 왕조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유다의 르호보암과 북부이스라엘의 여로보암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둘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나라의 위상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으므로 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 했다. 하지만 좀 더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나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