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여행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20)-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의 파괴력

달리는 말(이재남) 2015. 9. 11. 06:08

 

 

 

 

 

 

 

 

사진설명
1-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 아래의 불상
2~3-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
4-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의 그림
5~6-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에서 바라보이는 울란바토르 시내
7-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 아래의 이태준열사의 기념공원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의 파괴력



농경민족에 대한 그들의 우월성은 말에서 나왔다. 초원과 말과 활의 결합이 유라시아대륙의 역사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말을 달리면 수 개월만이면 도착한다. 민족과 군대의 이동이 지구상에서 가장 신속한 무대, 즉 몽골-중국 북부-중앙아시아-중동에선 수많은 왕조·제국·민족·종교가 명멸한 역동적인 역사가 펼쳐졌다.
말을 맨 처음 전쟁에 사용한 것도 유라시아 초원의 전사(戰士)들이었다. 인간의 체력에 동물의 체력이 보태지면서 기마군단의 파괴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그 기마군단의 전술 발전 곡선이 피크에 도달한 곳에 칭기즈칸이 있었다. 몽골-투르크系 유목민족은 [군사=경제] 조직이었다. 평화 시에는 유목민으로 생활하고 전시에는 기마군단으로 변했다.
평상시에는 목동의 말, 전쟁을 할 때엔 전사들의 말이 된다. 전투 병력과 보급부대의 구별이 따로 없었고, 부족 전체가 기마군단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전·후방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 평상시와 전쟁 시에는 민간인과 軍으로 구분되고 전투부대와 보급부대, 전투원과 가족이 뒤섞이면서 한 덩어리가 된 데서 엄청난 기동력과·동원력, 그리고 효율성이 생겨났다.
이런 조직과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유목민족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국가역할을 했다. 그 국가는 군대 속의 국가였다. 기마군단이 대제국의 모태였지 국가가 서고 군대가 조직된 게 아니었다. 몽골系에 속했던 투르크族은, 몽골고원을 떠나 서진(西進)하면서 서돌궐, 호레즘, 셀주크터키, 티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 제국(인도), 맘루크王朝(이집트), 오스만 터키 등 세계적 제국을 잇달아 역사 속에 세웠다.
동쪽에 남은 몽골-투르크系는 북위(北魏), 위구르, 칭기즈칸 세계제국, 元, 淸제국을 건설하였다.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봉건적 분열, 부족 사이의 세력다툼 재연, 식민통치 등 많은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10진법 체제의 칭기즈칸의 군대



칭기즈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누어져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칭기즈칸군대의 부장(部將)들은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하여, 그의 처음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칭기즈칸 군대는 투석기, 쇠뇌나 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규모가 큰 성읍도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부터 점점 공격, 파괴나 약탈보다는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화의 유용함을 배우게 되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며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금나라의 신하였던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칸은 당초 중국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칸은 중국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킨 뒤 중국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제국의 칭기즈칸의 보호아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 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이었던 이날축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제국의 정벌에 나섰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으리만큼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샤(왕)를 상대로 무자비하고 잔인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중의 하나를 건설한 칭기즈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