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부자들의 무덤, 레꼴레따 묘지
이름난 식당가와 호텔가가 즐비한 곳을 지나고 다시 널찍한 대로를 지나 우리가 다다른 곳은 레꼴레따 묘지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음산함과 엄숙함, 고요함으로 표현되는 죽은 사람(자)의 집이란 이미지를 만회하고도 남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꼭 음산하다고만 표현할 수도 없고, 엄숙한 분위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고요하면서도 돋보이는 이 묘지는 마치 예쁘게 단장한 공원 같은 느낌마저 든다.
관을 땅 속에 매장하지 않고 방부제로 처리해 지상에 안치해 둔다는 점이 퍽 이색적이었는데 후손이나 가족의 성의가 각 묘역에 그대로 표현돼 있다. 묘역은 부자들의 무덤답게 납골당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며 구리로 만든 장식물들을 반들반들 닦아놓았다. 정성스럽고 싱싱한 꽃들로 가득한 곳, 촛불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깨끗이 정돈되어있고,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걸어놓은 사진, 예쁘게 새겨놓은 문구가 눈에 뜨이기도 한다.
가장 눈길을 끈 곳은 마돈나의“Dont cry for me Aegentina"로 유명해진 페론 전대통령의 미망인 에비타의 묘역이다. 살아있을 때 빈민들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줬다는 그녀의 대중적 인기도를 반영하듯, 국민들 마음속에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를 기리는 숱한 판넬과 꽃다발들이 놓여져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10에이커 크기에 6천여 개의 묘가 있는 유서 깊은 묘지로 1882년 개설됐다.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다운 조각물이다. 블록은 질서정연하게 형성하고 있어 공동묘지라기보다는 마치 잘 지어진 모형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 무덤에 묻히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다. 역대 대통령 13인과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도 매장되어 있는 유명인사들의 유택으로, 전통적으로 꾸며놓은 장식과 조각상들이 퍽 인상적이다.
리우데자네이루를 처음 발견한 탐험가 마젤란
남미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곳 아르헨티나의 원주민도 인디오이며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몇몇 종족이 살고 있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나서 반세기 정도 지난 16세기 중엽 이후 스페인사람들의 식민이 시작되었다. 1516년 솔리스가 라플라타 강을 발견하고, 1520년 마젤란이 마젤란해협을 발견한 후, 1535년 멘도사가 이끄는 대규모 탐험대가 파견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건설되었다. 마젤란이라는 사람은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이다.
포르투갈말로는 마갈랴잉시(Fernando de Magalhes)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하급귀족 출신으로, 마누엘 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1504∼1511년에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 이어서 15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왕의 중신 중 한 사람이었으나, 모로코에서 현지 무어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포르투갈과의 인연을 끊고 스페인으로 갔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돈이 많은 사람을 만나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쪽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으로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 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해협」, 「태평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항해도중 이곳에서 침몰당하고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것으로 예상하고 서진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가 되고 말았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 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필리핀 세부 섬의 왕 및 부하들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며, 27일에는 준비가 덜 된 채 막탄섬의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제도의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선 단원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1월 몰루카제도의 포르투갈 무역 권으로 들어갔다.
할마헤라 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 호는 난파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가득 실은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의 이름도 이때에 붙여진 것이다.
'중남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6)-몇 차례의 쿠데타를 겪은 혼란기 후의 현대사 (0) | 2013.12.20 |
---|---|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5)-아르헨티나의 간략한 역사 (0) | 2013.12.19 |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3)-「탱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지구 (0) | 2013.12.17 |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2)-「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0) | 2013.12.16 |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1)-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 이따이쁘댐 (0) | 201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