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여행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6)-중남미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달리는 말(이재남) 2013. 11. 8. 06:15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멕시코 칸쿤의 카리브해변

 스페인 바로셀로나 람블라스거리에 서있는 콜럼버스기념탑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 콜롬버스의 무덤

 

중남미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그런데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하게 만든 장본인,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그의 이름은 Cristoforo Colombo이다.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다가 1479년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바다지도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허락받고자하였으나 희망봉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스페인으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산물의 1/10을 자손에게 전승하는 특권을 주는 것" 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 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제도의 와틀링 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 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 선단에 의한 1493년의 제2회 항해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콜럼버스가 신대륙이 있음을 주장하자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달걀을 세워 보이겠다고 했고 누구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는 달걀을 깨뜨려서 세워 보였다. 새로운 시각,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고 다스리던 사람들은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스페인사람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오들에게는 공납과 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하던 사람들은 인디오를 학대·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선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1496년 본국으로 돌아오자 문책 당하기에 이른다. 1498∼1500년의 제3회 항해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502∼1504년 제4회 항해의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해협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 이 된 채 죽었는데,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서양 사람에 의한 아메리카대륙 발견은 1000년경 노르만인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스페인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을 구축하게 된 점에서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제3대 대성당은 스페인의 세비야대성당이다. 그런데 이 대성당은 1401년 착공하여 125년 뒤 완공했다. 이슬람사원의 유적지에 건설 된 대성당은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다음으로 큰 사원이다.

이 대성당을 보기 위해 이 세비야는 세계에서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들로 활기에 넘친다. 성당은 세계 제3대 대성당에 걸맞게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기도 하고 아름답게 꾸며놓은 성당이다. 이 대성당의 중앙 복도 오른쪽의 콜럼버스 묘 앞에는 옛날 스페인을 다스린 네 왕(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서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스페인을 다스린 네 왕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서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 스페인으로서는 콜럼버스가 영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스페인의 영웅이었던 콜럼버스는 중남미사람들에게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