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인 분위기가 많이 배어있는 밀라노
우리일행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든 중, Italy는 남부와 북부의 경제력 차에 의한 지역갈등이 심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경제력의 차이 때문에 분리 독립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 Italy는 지역별 경제력 차가 가장 심한 나라다. 실제로 유럽연합 통계에 따르면 남부의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주는 Europe 내 159지역 중 가장 가난한 10개 지역에 포함된다. 반면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 등 북부의 두 지역은 Europe에서 가장 부유한 10개 지역에 포함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광장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광장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광장
국내 총생산도 북부가 남부의 4배를 넘는다. 그런가하면 남부의 실업률은 북부의 2배이며 남부의 청년실업률은 무려 60%를 넘는다고 했다. 우리는 얼마동안을 달리다가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았다. 그리고 상점에 들어가 올리브기름을 한 병 샀다. Italy 곳곳에 많이 자라고 있는 올리브나무는 평화를 상징한다. 농촌의 여러 곳에서 많은 해바라기, 옥수수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 해바라기 씨앗이나 옥수수는 이태리인들이 먹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수출을 하고 있다. Europe의 어느 곳에서나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돈을 내야한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려고 음식점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화장실을 찾아 공짜로 볼일을 보아야함을 물론 목이 마를 때는 물을 사서 마셔야만 한다. 심지어는 음식점에서조차 물을 사서 마셔야만하기에 이곳에서 마시고 남은 물은 가지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상점에서는 빈 물통을 채워 나오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공짜니까.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성당-첨탑에 있는 마돈나 상(성모 마리아 상)
현대적인 분위기가 많이 배어있는 밀라노
밀라노는 피렌체나 나폴리 등 전통적인 색채가 강한 Italy의 다른 도시와는 조금 다르다. 현대적인 분위기가 많이 배어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전통의 역사들은 아직도 밀라노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탈리아 북서부 롬바르디아자치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36만 정도이다.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로 이탈리아의 경제적 수도라 할 수 있다. 롬바르디아평원의 중앙부, 올로나강과 람브로강 연안의 해발고도 122m 지점에 위치한다.
심플론고개·슈플뤼겐고개, 산고타르드고개 등으로 알프스를 넘어가는 도로가 집중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로마(태양도로), 토리노·제노바(꽃의 고속도로), 베네치아 등의 대도시와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BC 222년 로마는 선주민인 켈트인을 정복하여 밀라노를 획득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AD 3세기에는 게르만인의 위험증대에 대처하는 중요 군사거점이 되었고, 3세기 말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개혁으로 제국이 이분되면서 제국 서부는 행정·황궁중심지가 되어 404년 행정부가 라벤나로 이전할 때까지 서제(西帝)의 본거지였다.
성 암브로시오가 밀라노대주교로 취임한 뒤(374),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반박했기 때문에 밀라노대주교는 로마대주교 못지않은 권위를 가졌다. 5세기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시달렸으나, 이 와중에서 밀라노대주교는 점차 세속권력을 획득하여 오토황제시대(10세기 후반)에는 대 봉건영주가 되었다.
11세기 황제의 원조로 대주교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서 봉해진 신하는 도시귀족이 되어, 상공업 발전에 힘쓰고 있었던 시민 층과 일시 대립하였으나 1067년 양자가 공동으로 도시공동체인 코무네(comune)를 형성하여 대주교의 권력은 후퇴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갤러리아
이탈리아의 지배에 목표를 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롬바르디아도시동맹에 패배함으로써, 1183년 양자간에 콘스탄츠에서의 화약이 성립되었는데, 밀라노도시공동체는 이 화약에서 광범한 자치권을 얻었다. 이미 밀라노는 롬바르디아에서 하나의 큰 세력이었으며 모직물과 알프스의 여러 광산을 배경으로 한 무기생산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1237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패배를 계기로 종래의 도시귀족과 신흥 상공업자와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었다.
1277년 도시귀족의 대표 비스콘티가가 정권을 장악하고, 1395년에는 비스콘티가의 잔 갈레아초가 공작의 작위를 획득함으로써 밀라노공국이 성립하였다. 공국은 이탈리아에서 큰 세력이 되고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스콘티가에 이어 스포르차가가 공작의 작위를 계승하였으나 1515년 강대한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에게 공국을 양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전쟁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승리한 에스파냐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1535년 밀라노를 획득하여, 1540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 밀라노는 에스파냐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으며 점차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갤러리아
스페인왕위계승전쟁으로 1714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어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계몽주의적 정치에 의해 경제가 상당히 발전하였다. 1796년 이후 밀라노는 나폴레옹 1세의 지배를 받았으나 1815년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롬바르드-베네트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859년 통일이탈리아왕국, 사보이아왕국에 병합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한발 앞서 산업혁명을 달성한 밀라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이다. 롬바르디아평야부에서의 풍부한 농업생산과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생사(生絲)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국가통일(1861)기의 밀라노는 상업도시 지역에 들어 있었다.
이후 1870년부터 1920년에 걸쳐 면방직·고무·전력·기계·제철·자동차 등의 공업이 발전하여 제1급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현재는 기계·제철·화학·약품·석유화학·고무·전기·섬유 등 극히 다양한 공업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토리노에 있는 피아트사(社)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대기업의 대부분이 본사를 밀라노에 두고 있어 전국 주식회사 자본금의 약 40%가 이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대기업의 실제생산기구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시의 주변부로 분산하는 경향이 보이며 시내에 남아 있는 것의 대부분은 중소규모의 생산단위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포로체스코성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포로체스코성
따라서 밀라노는 광범위한 주변지역을 포함하여 하나의 큰 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61년에는 24만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73년에 최고 174만 5220명을 기록하고 그 후는 감소 추세에 있다. 밀라노는 많은 역사적 건축물·박물관·대학·미술관 등이 있는 문화와 전통이 숨쉬는 도시이다.
시의 중심부에 있는 두오모(대성당)는 1386년 비스콘티가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착공되어 1809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가까스로 완성된 이탈리아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르네상스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성당(1464~1490)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불후의 명작인 벽화 『최후의 만찬』이 소장되어 있다. 374년에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었고 지금도 밀라노시의 수호성인으로서 추대되고 있는 성 암브로시오에 의해 창설된 로마네스크양식의 성 암브로시오성당(11세기에 재건)도 유명하다.
르네상스기 밀라노의 지배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밀라노공;1450~1466)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는 박물관인 스포르차성,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극장(1776~1778), 두오모광장과 스칼라극장 앞의 광장을 연결하며 유리를 끼운 천장이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케이드(1865~1877) 등도 볼 만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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