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금강대협곡,북경,용경협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북경 여행(3)-한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자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

달리는 말(이재남) 2008. 9. 8. 22:07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황궁, 위화궁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1906~67)가 일본제국의 이른바 만주국 위황제로 있을 때 황궁으로 살았던 곳을 현지인들은 위황궁이라고 부른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건물이 황궁진열관이고, 오른쪽의 황색기와를 올린 건물이 길림성박물관이다. 황궁진열관에는 부의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과 물건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당시 일본침략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방도 있다. 박물관을 나서면 광복시장이 나타난다.

이곳은 활기가 넘치는 자유 시장으로 국영상점에 비하여 가격은 약간 비싼 편이지만 물건의 종류가 다양하여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다. 위만황궁박물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9.18을 잊지 말자.」라는 문구의 비석은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고 있다. 비석 뒤에 있는 즙희루(汁熙樓)는 만주국의 황제였던 부의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으로 서쪽에는 그의 침실과 서재가 있다. 

서재에는 부의가 관동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듯이 보이는 모습을 담은 미니어처가 있는데, 만주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건물의 동편에는 부의의 황후인 원용의 거처가 있다.  어린 나이에 황실로 시집와 망명 생활을 전전하다 결국 아편중독자로 죽어야 했던 그녀의 슬픈 인생을 자료와 미니어처로 구성해 놨다.    

즙희루를 지나면 만주국의 공식 업무를 보던 근민루가 나온다.  근민루의 1층은 사진과 문서 자료실로서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어떻게 중국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사용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층 접견실을 지나 3층에 오르면 유럽의 무도회장을 방불케 하는 연회장을 만날 수 있으며 그의 일생에 관심이 있다면 사랑방으로 가보면 알 수 있다. 

부의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일기장, 만주국황제의 자리에서 퇴출당할 때 입었던 죄수복 등과 「부의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소장품을 보관하고 있다. 위만주국무원은 만주국의 최고행정기관이지만 일본 동경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본떠 1936년에 완공했다. 현재는 전시관과 의학센터로 이용되고 있지만 일반인의 출입은 만주국 지배 당시의 사진 자료가 전시된 1층까지로 제한되고 있다. 

건물 안의 계단과 난간에는 무언가 뜯겨져 나간 듯 흔적이 있어 여행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 일제말기 무기를 만들기 위해 금속이란 금속은 모두 뜯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고 관청이 이 정도라면 국민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에는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어 장춘역과 관동군사령부를 연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습에도 무사하게 요인들을 이동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현재는 폐쇄되어 둘러볼 수 없다.

장춘에서 볼 만한 또 다른 장소로서 장춘전영성이 있다. 장춘전영성(長春佃影城)은 영화의 도시인 장춘의 영화세트장이다.  한때 중국영화의 요람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붐비던 곳이지만 현재는 관광지로 탈바꿈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장춘전영성은 크게 세트장을 재현한 영화대세계와 동감정영이라는 극장 두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일행 19명은 장춘 세계조각공원의 관광을 마치고 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통화의 통화현 호텔에 들어갈 때까지 전용버스로 4시간 반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부부가 투숙한 315호실에 들어간 시간은 거의 10시경이고 샤워를 하고 또 여행기록을 챙기다보니 11시를 넘긴다. 통화는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로 가기 위한 관문도시다. 

3000년 전부터 중국사서에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변변한 유적조차 없다.  그저 기차를 갈아타거나 잠시 머무르기 위해 들르거나 또는 다른 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도시일 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아본다면 옥황산 공원 정도를 볼거리고 꼽을 수 있다.  교통편 연결이 수월치 않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통화에 머물게 된 여행지라면 한전쯤 방문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탄 전용버스가 그 공원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바라본 산 위 팔각정의 풍경은 제법 그럴듯해보였다.

 

한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자 우리의 영산인 백두

 

여행을 떠나온 이틀째 되는 날 아침은 5시 반에 모닝콜이 있고 6시부터 아침식사를 시작해서 6시 40분에는 호텔을 출발해야한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진 백두대간의 시발점,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체험을 위해 서둘렀다. 백두산은 높이 2744m로 북위 41도 1분, 동경 128도 5분에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하여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여왔다. 또한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 해왔으며 중국의 금대(金代)인 1172년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금나라사람들은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이곳을 왕조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한다.

통화를 출발하면서 전용버스를 골목에 세워놓고 이송수씨는 간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그 간식이란 만주지방의 어느 곳을 달려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옥수수 밭인데 그 만주옥수수와 고구마를 풍부하게 사들고 들어와 나누어준다.  1986년부터 중국을 통해 백두산천지를 관광할 수 있었다고 하니 2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관광했을 터인데 지금에야 그 대단한 백두산과 천지를 구경하려고 전용버스를 타고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백두산천지를 관광하려면 2003년 전에는 북파코스로 올라가 백두산천지를 구경할 수 있었단다. 이제는 차량으로부터 1326계단만 오르면 구경할 수 있는 서파코스로 올라가기 위해 백두산 입구까지 힘차게 달려가야만 한다. 전용버스 안에서 그 맛있는 만주옥수수를 뜯어먹으면서 백두산 서파입구까지 무려 4시간 40분을 달리는 동안, 한 번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에 다녀오기는 하였으나 계속 달렸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특기할만한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휴게소라고 내려 보았더니 말이 휴게소지 쉴 곳은 없고 화장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역질이 나서 잠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1950~60년대를 회상하게 만드는  끔찍하여 생각하기조차 싫은 곳이었다.  전용버스로 달리면서 일행 19명은 자기소개를 통해 서로 인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중외제약회사에서 문치장 부장님부부와 유승언 과장님과 그의 초등학교 4학년생 아들 유용환군, 이호종씨 부부, 엄기필 씨 부부 그리고 안찬용 씨와 그의 초등학교 6학년생 딸 안정현양 등 10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S.K telecom의 과장님이신 정종명 씨 부부, 쌍문동의 최성옥 씨 부부, 월계동의 김기원 씨 부부와 그의 아들 김병훈 군과 우리부부를 합해 19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이었다.조금 지루하기는 하였으나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백두산 만구진을 통과하여 백두산서파 입구까지 잘 왔다. 점심식사시간으로는 다소 빠른 감은 있었지만 더 올라가면 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없다니 서파입구 식당에서 현지 식 식사를 할 수밖에 없단다. 식사를 마친 우린 장백산(백두산)이라 쓴 기념간판아래, 주차장에 세워둔 백두산천지 입구까지만 통행하는 셔틀버스를 타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입구에는 기념탑과 관광안내도가 서있었으므로 우리는 기념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셔틀버스를 타고 50여분 쯤 이러 저리 흔들리면서 백두산천지 입구까지 올라가는 동안 들꽃이 만발한 야생화의 자생지, 고산화원을 볼 수가 있었다.                     
      

백두산 입구

백두산 입구

백두산 입구에서 천지입구까지 관광객을 싣고다니는 셔틀버스

백두산입구의 점심식사를 한 음식점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서파코스도

 백두산 입구

백두산 입구

 백두산 천지를 올라가는 1326계단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