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여행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다녀와서(23)-스페인의 역사

달리는 말(이재남) 2006. 8. 18. 11:48

   

-스페인 바로셀로나 가우디의 성 가족성당- 

-천재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구엘공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왕궁- 

-바로셀로나 올림픽 종합경기장- 

-가우디의 성 가족성당의 전경-

 

 

스페인의 역사

 

코르도바를 출발 마드리드로 향하기는 하였지만 무려 전용버스로 6시간을 달려야 한다. 중간에 두 번이나 휴식을 취해가면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시청하게 배려를 해주었다.  그 지루한 시간을 잘 활용하여 스페인의 역사와 마드리드에 관한 설명을 너무도 자세히 해주었으므로 마드리드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의 역사를 다 기록하기란 무리일 것 같다. 그러나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알 필요가 있는 중요한 부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챨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운명함으로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막을 내렸고, 스페인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이 계속된 끝에 프랑스 국왕 루이의 손자 필립 5세가 왕권을 장악해서 부르봉(Bourbon)왕조의 시조가 된다.

부르봉 왕조는 스페인을 통일하고 안정과 개혁을 추구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18세기말까지 지속되었으나, 이런 발전도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변혁과 함께 종말을 맞게 된다.

루이 16세가 1793년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스페인은 신설 프랑스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패전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포르투갈 침략의 경유지라는 구실로 스페인에 들어와서는 챨스 5세를 설득해 결국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조셉(Joseph Bonaparte) 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이에 대항하여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폭동이후 스페인 국민은 하나로 단결, 그 후 5년간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을 지속했다. 마침내 1815년, 웰링톤(Willington)이 이끄는 군대는 나폴레옹을 몰아내고, 페르디난드 7세를 옹립하고 왕정을 복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페르디난드의 20년 통치는 스페인 정국을 큰 혼란 속에 빠져들게 했다. 그는 종교재판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와 헌법주의 주창자들의 목을 베었고, 자유 발언을 억압했다.  스페인 경제는 후퇴일로에 놓이게 되고, 미국은 이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1833년 그가 죽자 그의 동생 카를로스(Don Carlos)가 이끄는 보수파와 그의 딸 이사벨라(후에 이사벨라 2세가 됨)를 옹호하는 자유파 사이에 제 1차 왕권 쟁탈전이 야기되었다. 1868년에는 9월 혁명이 일어나 이사벨라 2세가 쫓겨나고 1873년 제1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18개월 만에 군대가 이사벨라의 아들 알퐁소 12세를 왕으로 하는 왕정복고를 단행한다. 19세기동안 스페인 경제는 이러한 정치적 격동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에 힘입어 번창했다. 그러나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은 급기야 스페인왕국의 몰락을 초래하는데, 미국이 해전에서 잇달아 스페인을 격퇴함으로서 스페인은 그간 확보해 온 식민지들을 잃게 된다.

일단 쿠바가 독립을 선언했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도, 모로코에서 군부가 초래한 혼란들, 증가하는 정치적 불안과 급진파들에 의한 기초 질서 전복 시도 등 스페인을 둘러싼 소란들은 그칠 줄을 몰랐다.

1923년 내란의 위기상황에서 Miguel Primo de Rivera가 스스로를 군부 독재자로 자칭하고 나와 1930년까지 나라를 지배하고, 1931년에는 알퐁스 13세가 도망가면서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 역시 갈등의 불씨를 끄지 못하여, 1936년 선거를 둘러싸고 다시 국론이 양분된다.

그 한 세력은 공화국 정부와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사회주의자, 시민단체, 권력이 약화된 교회세력 등, 전적인 합의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형성된 그 지지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대, 교회, 왕족, 파시즘적 스타일의 팔란세당(Falange Party)이 연합한 보수 우익 국수주의자들이다.

1936년 공화국 경찰에 의한 야당 지도자 소테로(Jos Calvo Sotelo)의 암살 사건은 군대에 정부 전복의 구실을 제공한다.  뒤이어 일어난 1936-39년 내전동안,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장군이 이끄는 국수주의 세력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로부터 거의 무제한적으로 군사, 재정 지원을 받은 한편,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러시아와 유명지식인, 예술인(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리 리 등)으로 구성된 국제조직의 심리적 지원이 고작이다. 

1939년 프랑코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60만 이상의 스페인국민이 죽음을 당했으며, 전후에는 수천 공화당원들이 처형되고 감옥에 가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프랑코가 권좌에 있는 35년간 스페인은 경제 봉쇠로 따돌림 받고, 나토와 UN으로부터 축출되었으며, 경제 공황에 빠진다.

그러다가 1950년에 들어서 관광 정책이 활성화되고, 미국, 로마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등 국교 정상화와 외자 유치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서서히 회생하기 시작, 1970년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국의 하나로 재부상하기 시작한다.  1975년, 알퐁소 13세의 손자이자 후계자, 본명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세칭  랑코왕이 죽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스페인은 독재 정치에서 민주 정치로의 진화를 이룩했다. 1977년에는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고 1978년에는 새 헌법초안이 마련되고, 1981년에는 복고 주의자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1986년 EC(현재의 EU)에 가입했고, 1992년에 이르러 스페인은 일류국가로의 복귀를 주창하고 나서,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세빌리야 92 엑스포를 열고, 마드리드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선포하기도 했다.  1996년 투표에서 엘튼 존의 팬이자 전 세무감시관인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Jose Maria Aznar)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