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7 Sophia Jones
A picture taken on March 14, 2014 shows a partial view of the ancient oasis city of Palmyra, 215 kilometres northeast of Damascus. From the 1st to the 2nd century, the art and architecture of Palmyra, standing at the crossroads of several civilizations, married Graeco-Roman techniques with local traditions and Persian influences.
고대 사막 유적이 있는 도시 팔미라가 IS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라 사라즈 박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역사를 지우고 유물을 팔아 치우려는 강경한 전투원들이 세계 문화 유산을 파괴할까봐 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팔미라의 높은 크림빛 기둥에서 아주 가까운, 악몽의 장소인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를 향했다.사라즈와 같은 많은 시리아 인들에게 있어 팔미라(아랍어로는 타드모르라고 한다)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적 유명 장소일 뿐 아니라 아사드 정권 하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압제의 가장 큰 상징이기도 하다.
IS가 시리아 정권을 몰아내고 팔미라를 점령할 때 국제적 관심은 팔미라의 고대 역사에 쏠렸지만, 사라즈는 현대에 팔미라에서 자행된 잔인함이 간과되었다고 말한다.“타드모르는 끊임없는 고문과 공포다.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다.” 현재 시카고에서 살며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사라즈는 스카이프를 통해 월드포스트에 이야기했다. 시리아의 전 대통령 하페즈 아사드 시절,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는 즉결 처형과 대학살로 악명 높았다.
그의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집권하고 난 뒤 2001년에 –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 이곳은 문을 닫았다. 정말로 닫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에 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전쟁이 터진 뒤, 시리아 인들은 타드모르가 다시 열려 반체제 인사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아사드 대통령 시절, 휴먼라이츠워치(HRW)가 199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1980년에 단 하루에 최소 500명 이상의 재소자가 학살 당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며 이곳을 ‘죽음과 광기의 왕국’이라고 불렀다. 2001년의 암네스티 보고서에서는 재소자들이 ‘외부 세상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하며, 이 교도소가 ‘재소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 모욕, 공포를 줄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다고 했다.
- 고대 사막 유적이 있는 도시 팔미라-
고문 기술로는 걸어놓은 타이어에 죄수 매달기, 막대기와 케이블로 전신 구타하기, 억지로 척추를휘게 만드는 금속 장치인 ‘독일 의자’에 묶어 놓기 등이 있었다.시리아의 여러 감옥에서 12년을 보내며 그 중 9년을 타드모르에서 지낸 사라즈는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자신이 혐오하는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포스트에 따르면 IS 전투원들이 타드모르 재소자들을 풀어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월드포스트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건 자유 세계의 폐단이다. 만약 다에쉬가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면, 자유 세계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다에쉬는 IS의 아랍어 별명이다. 국제인권감시기구 중동-북아프리카 부회장인 나딤 호우리 역시 시리아의 억압의 상징인 타드모르의 문을 연 것이 IS라는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다. “잔혹한 지배를 벗어나 다른 잔혹한 지배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가 전화로 말했다. U.N. 인권고등판무관 대변인인 라비나 샴다사니는 목요일에 제네바에서 시리아 정권은 IS가 몰려오는데도 정부 세력이 팔미라를 떠날 수 있게 될 때까지 민간인들이 팔미라를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IS가 팔미라에서 저지를 범죄에 대한 깊은 우려도 표명했다.“IS가 팔미라에서 집집마다 뒤지며 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 팔미라에서 최소 14명의 민간인이 처형 당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로이터에 한 말이다. 팔미라를 점령한 IS는 민간인 수만 명을 총부리 앞에 두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5월 20일에 IS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IS와 시리아 정부군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전투를 벌이며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 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https://www.huffingtonpost.kr)
시리아 곳곳의활동가들을 통해 전쟁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영국의 반전 그룹 시리아 인권 감시 단체에 따르면, 목요일 기준으로 그들은 시리아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5월 17일에 이라크의 요충지 라마디를 장악한 뒤 불과 사흘 만이다.매체에서는 2,000년 된 유적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지만, 사라즈는 그곳에 얽힌 자신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지금도 고문 받던 친구들의 비명과 벽의 핏자국을 기억한다. 그는 감옥에 갇혀 낭비한 그의젊은 시절의 여러 해, 마음을 다 앗아가는 공포와 참담한 권태를 잊을 수가 없다.
21세의 대학생이던 사라즈는 1984년에 시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1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이 수감된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 하페즈 아사드가 정치적 목적으로 정치범 1,000명 이상을 석방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성인 남성이었다. 신분증도, 직업도, 인생도 없었다.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옮긴 뒤였다. 그는 다행히 미국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1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들은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서 다시 만났다. 사라즈의 가족 역시 사라즈처럼 훨씬 늙어 있었고, 그는 가족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눈물이 고인 걸 보고 내 가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겐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사라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메꾸려고 하바드와 노스웨스턴 등에서 공부했지만, 타드모르는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 그는 시리아 정권이 죄값을 치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그는 이제 50대가 되었지만 타드모르 교도소의 마당,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또 한 차례의 고문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던 기억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그때 생긴 흉터가 지금도 그의 몸에 남아있다.그는 아사드 정권이 민간인들에게 통폭탄(barrel bomb)을 투하하는데,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은 IS 거점만 공격한다며 바샤르 아사드를 공격하지 않는 서방세계를 비난했다.
“내 생각엔 그건 위선이다. 시리아 인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2014년 3월 14일에 찍은 사진. 다마스커스에서 북동쪽으로 215km 떨어진 고대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 전경. 시리아의 전설적인 그레코-로만 오아시스 유적 팔미라에 마지막으로 여행자가 찾아온 것은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 후인 2011년 9월이었다. 가장 최근에 찾아온 것은 폭력과 약탈이다.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러 시리아 인들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계 문화 유산이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IS 대원들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전투 중에 몸을 숨기고 있다. 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https://www.huffingtonpost.kr)
“유적은 중요하다. 유적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IS가 장악했다고 해서 타드모르에 관심을 갖지만, 홈스나 다마스커스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건 정말 한심한 것이다.”소셜 미디어의 글과 사진들이 전부 사실이면 어쩌나, 시리아 정권 세력이 퇴각한 뒤에도 아직 타드모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 사라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남아 있는 재소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데일리 비스트’에서 팔미라의 반 아사드 조정 위원회 회원이라고 설명한 칼레드 옴란은 정권 측이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사용해 팔미라를 요새화해서 IS를 막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데일리 비스트’에 “재소자들을 태운 버스 10대 정도가 전선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목요일에는 트위터에 확인되지 않은 글이 돌았다. IS 대원들이 레바논 인 이십여 명을 포함한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석방했다는 내용이었다. 월드포스트가 직접 사실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 트위터 사용자들은 타드모르에 정말 아직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재소자들이 있었다면 IS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
베이루트에 있는 호우리는 타드모르 등의 군사 교도소에서 연락이 두절된 가족들의 정보를 수십 년 째 기다리는 레바논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때였다면 예전에 억류되었던 사람들의 가족들이 교도소로 달려갔겠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 생길지 불확실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는 증거물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집단 무덤과 재소자 파일 정보는?” 사라즈는 타드모르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채 아직 남아 있는 재소자들이 있다면 IS에 합류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내가 석방되었을 때, 난 소련이 붕괴했다는 것도 몰랐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다른 세상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풀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방에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 월드포스트(The World Post)의 중동 전문기자 소피아 존스가 쓴 'Palmyra, ISIS' Latest Conquest, Has Dark History Of State Torture And Abuse'(영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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