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공산주의 지도자,호치민
베트남이 사랑한 혁명가 호치민은 한 도시의 이름을 그에게 바치는 것만큼이나 큰 사랑의 표현이랄 수 있다. 호치민 시티는 호치민아저씨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사랑이 서린 곳이다. 「사이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아름다운 도시는 혁명가 호치민에게 헌정되었다.
-호치민 Cu Chi Tunnels(꾸찌 터널)의 호치민의 동상-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호치민의 본명은『응우엔 탓 단』이었다. 「성공할 사람」의 뜻을 가진『응우엔 탓 단』이란 이름을 버리고 1942년부터 호치민, 즉「깨우치는 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호치민 뮤지엄 앞길의 이름이 바로「응우엔 탓 단(NguyenThatThanh)」거리이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자 베트남 통일정부는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호치민」으로 명명했다. 호치민 시(市)곳곳에서 동상과 기념관 등 호치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호치민 박물관이 자리 잡은 곳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호치민 시 중앙우체국의 호치민의 초상화-
1911년, 당시 21세이던 호치민은 호치민박물관 옆의 사이공 강 부두에서 프랑스 화물선「아미랄 라투셰-트레빌 호」의 주방보조로 취직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떠났다. 이후 무려 30년간 타국을 돌며 혁명을 도모해, 명실상부한 통일 베트남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 박물관에는 호치민이 살아있을 적 사용하던 안경, 지팡이, 타자기 등의 유물이 2,000여 점 가량 전시되어 있어, 살아있을 당시의 이 혁명가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호치민 시의 인민위원회청사 앞 호치민동상-
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정치가였던 호치민은 게안성(省)출생으로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봉기가 한창일 때 하급관리 출신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反)프랑스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1917∼23년 프랑스에서 구엔아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에 참가, 혁명지도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처리를 위한 베르사유강화회의에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조국해방을 위한 8항목」을 제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1924년 모스크바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참여한 뒤 코민테른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베트남 청년혁명동맹을 조직,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하노이 바딘광장의 호치민 영묘-
1942년 투쟁지원요청을 위해 중국에 갔다가 중국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었으며, 이때부터「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닌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석방이 된 1945년 8월 총봉기를 감행하여 하노이를 점령,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의 교섭이 결렬되자 대(對)프랑스 항전을 직접 지휘하였고 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여 55년 북위 17˚선 이남에 반공산주의 베트남정권이 수립되자 조국재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호치민 문화의 전당인 오페라하우스의 필자가족-
미국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혁명정신을 고무시키며 항전하다가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죽었다.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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